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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Jun 09. 2024

촌놈은 이렇더라

산문집 『촌놈』 독후감

 나라고 세련되고 그럴듯한 도시 놈이 좋지 않겠는가? 갑자기 촌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이차저차 따지지 않고 그를 만나러 간 것은 순전히 그에게 붙은 형용사 때문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단어 '고요하고 진실된'.

 요즈음처럼 시끄럽고 말만 요란한 세상에서 고요한 사람이라면 분명 내면에 깊은 사유가 깃든 영혼일 테고, 그런 사람이 진실하기까지 하다면 나는 짝사랑을 할 태세가 되어있다. (그쪽에서 어찌 반응할지 모르므로 짝사랑이다.)

 그래서 촌놈의 고요함과 진실함에 감동하고 왔느냐고? 솔직히 그를 만나자마자 그 형용사를 잊어버렸다. 그것을 가늠하기도 전에 어떤 일이 생겨 버렸기 때문이다. 깨알처럼 재미있는 일이.

 뜻밖에 촌놈은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 만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 나를 시간여행 캡슐에 앉혀 놓고서 어린 시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탈로 데려가 주었다. 이건 보통 호강이 아님.

 수능 마친 날 나도 그 비밀의 다락방에 초대되었으니까. 쿵당 쿵당하는 새가슴을 안고 밤을 새우며 홈메이드 더덕 주를 기울였다. 병아리 눈물만큼씩 홀짝홀짝. 쓰고 달고 복잡한 어떤 맛에 아딸딸해지고, 작은 창문에선 밤하늘의 별들까지 부러워 기웃거린다. 길을 가야 한다니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그의 손을 잡고 소녀의 좁은 계단을 지나 어른의 장으로 통하는 삐걱거리는 복도를 걸어 나왔다.

 그렇지만 그다음 도달한 시간은 어른이 아닌 어린이 나라. 주인공은 술래잡기하던 골목길에서 술래 하다 말고 스르르 잠이 들어버린다. 미래와 과거가 이어지는, 시간과 시간 속에서 두려움과 신비에 감싸여 헤매는 우리 촌놈 어린이. 나는 그가 여행한 세계를 스케치하기로 했다. 검푸른 바다 위 옅은 회색빛 안개, 엷은 꽃향기 번지고, 안온함이 감도는, 나른하게 기대고 싶은 그 나라를 그린다.

 만두에 일가견 있는 그 집안의 꿀같 맛난 만두도 실컷 먹었다. 반듯하게 줄 세워 허다한 만두 병사들을 제압하는 그의 아빠를 나도 뒤에서 흠모하며 지켜보면서.

 촌놈들은 보통 우직하지 않은가? 그는 아무래도 촌놈 중에서 돌연변이인 듯싶었다. 변덕이 죽 끓는 사람이었다니. 익살스러운 변덕쟁이들이 어울렁 더울렁 어울리는 곳을 꿈꾼다나?

 촌놈의 친구들도 몇 명 소개받았는데, 끼리끼리 모인다고 비슷하게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내가 늘 꿈꾸던 것과 똑같이 완벽한 서재를 그려낸 친구도 있고, 다락방만큼이나 부러운 두 평짜리 자기 방이 생긴 이가 있다. 작은 콘솔이 있고 노란 체크무늬 커튼이 달렸다니, 내년 봄에는 그 노란 방에 꼭 놀러 갈 것이다. 내가 늘 배우고 싶었던 '다정함'에 일가견 있는 친구도 있고.

 그리고 전국 주부퀴즈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친구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결코 촌놈이 아니다. 촌놈으로 분장한 예사롭지 않은 무리! 어떤 이름을 지어줘야 할까?

 시간여행에서 가장 보람된 일 중 한 가지는 학교 앞에 바로 집이 있던 촌놈의 친구에게 방을 얻어 준 일이다.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우리가 친구 아버지를 설득하고, 십시일반 해서 학교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셋방을 구했다. 그 친구가 행복해하던 표정이라니! 이제 더 이상 집이 학교 코앞이라 모든 사람의 등하교를 지켜보거나, 지켜 봄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치만 뭐니 뭐니 해도 촌놈에게 끌린 치명적인 이유는 그의 맑고 순박한 로맨스 때문이다. 그 시절 우정 어린 친구가 되어 왜 유학을 포기하느냐며 공부하고 와서 결혼하라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부러움을 감추고 있었다. 스물둘 꽃다운 나이의 프랑스행을 포기한 사랑의 묘사는 얼마나 간결한지. 폭우에 약한 절벽처럼 심장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었다고…. 그 한 줄에서 천둥과 번개와 수많은 붉은 장미송이와 두근거림을 읽었다.


그래서 만나고 와서 어땠느냐고?

빙그레 미소가 나오고, 다음에 만나면 할 이야기가 생겼다. 촌놈의 맨 얼굴이 이토록 멋지다면 나도 촌놈 하고 싶다는. (그러고 보니 저도 섬 출신입니다.)

"저도 좀 끼워주세요. 촌놈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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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은 캐리소 작가님(이화정) 외  8인(임수진, 김보경, 김은영, 류경희, 박옥심, 정혜원, 배정환, 한영옥)의 산문집입니다.

 글의 여러 부분에서 이 산문집 안의 문장을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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