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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Nov 17. 2024

거장도 모방을 통하여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신곡』(5)

 신곡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지옥, 연옥, 천국 세 가지 세계를 구현해 낸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이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냈을까?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있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뼈대는 몇 안 되며 단순하다. 세세하게 그곳을 묘사하고 인물을 배치시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었다. 특히 <연옥>과 <천국>은 그때까지 그 누구도 모습을 그려낸 적이 없어서 더욱 걱정되고 떨렸나 보다. 도입부에서 무사(뮤즈) 여신들과 이들의 우두머리 아폴로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여러 행의 싯(詩) 구가 있다.  

 단테는 지옥을 원뿔형 구조로 늪과 강, 언덕과 돌 동굴등을 배치하며 독창적으로 설계했다. 성경의 단어들도 참고했을 테지만 언뜻언뜻 스승의 작품에서도 힌트를 얻었을법하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아이네이스』에 저승 이야기가 나오는데 비슷한 대목이 여럿 보인다.      


## 구조와 공간 묘사에서 모방한 부분이 있다.


 『아이네이스』6권에서 아이네아스는 저승으로 가서 아버지 앙키세스를 만난다. 뱃사공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태우기를 주저하는 정경 등이『신곡』의 지옥편 처음 부분과 비슷하다.     

 

이곳은 그림자들과 잠과, 졸음을 가져다주는 밤의 나라요. 살아있는 자들은 스튁스 강의 배를 타지 못하게 되어 있소.-- 배의 긴 의자들에 앉은 혼백들을 내쫓고 통로를 치우더니 거인 아이네아스를 태웠다. 가죽을 이어 붙인 배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네이스』6권에서)      

      

레테강을 보았다. 그 강 주위에는 수많은 부족들과 민족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청명한 여름날 풀밭에서 벌 떼가 다채로운 꽃들 위에 내려앉고 흰 백합들 주위로 몰려다니고 온 들판이 윙윙거리는 소리로 가득 찰 때와도 같았다.* (『아이네이스』6권 705-709)     


또 파리가 모기에게 밀려나는 시각에

언덕에서 쉬고 있는 농부가 아래 계곡,

포도를 수확하고 쟁기질하던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들을 보듯이**  (지옥편 26곡 27-30)     


## 저승의 심판관으로 미노스가 등장하는 것도 비슷하다.(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지만)


여기서 그들에게는 추첨에 의해, 재판관에 의해 자리가 배정되었다. 미노스가 재판장으로 제비들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흔드는데 * (『아이네이스』6권 431-432)


거기엔 미노스가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입구에서 죄들을 조사하고 판단하여

자신의 꼬리가 감는 숫자에 따라 보냈다.** (지옥편 5곡 4-6행)


## 혼백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반응하는 방식에서, 어느 때는 비슷하게 어느 때는 똑같이 기술했다.  

   

보라, 저기 팔리누루스도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네아스는 짙은 어둠 속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간신히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 더러는 함성을 질렀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쩍 벌린 입에서 고함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이스』6권)  

   

세 번이나 그는 거기서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으나

세 번이나 환영은 헛되이 포옹하는 그의 두 손에서 빠져나갔다.

가벼운 바람결처럼, 그 무엇보다도 날개 달린 꿈처럼* (『아이네이스』6권 700-702)  

   

나도 감동하여 똑같이 그를 껴안았다.

, 겉모습 외에는 헛된 영혼들이여!

내 손은 세 번이나 그를 껴안았지만

그대로 내 가슴에 되돌아올 뿐이었다.** (연옥편 2곡: 78-81)     

     

## 장래에 대해 예언하는 방식도 따라서 했다.

 

 단테는 지옥, 연옥, 천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장래 일을 이야기한다. 아이네아스는 저승에서 아버지 앙키세스로부터 로마 건국에 대한 상세한 비전을 얻는다. 이 부분은 베르길리우스가 또 호메로스의『오뒷세이아』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오뒷세이도 저승에서 혼백들을 만나 거기서 만나는 많은 영혼들로부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 세 주인공들이 저승에서 죽은 영혼들과 나누는 대화는 요즈음 스토리텔링에서 과거로 건너가 옛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을 떠올린다. 요즈음 글쓰기에서 많이 유행하는 시간여행의 원조가 아닐지.

 오뒷세이가 죽은 영혼들을 만나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여신 키르케의 인도에 따라 어떤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면 혼백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방식이다.『오뒷세이아』에서는 저승의 풍경 묘사가 무척 단순하고 별로 없다. 즉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를 거치면서 저승에 대한 공간 묘사가 점점 다채롭고 세밀해지는데 단테에 이르러 그 상상력이 폭발한 듯싶다. 

 

## 셰익스피어도 종종 옛이야기에서 비극의 구도를 빌려오지 않았을까?

 

 연옥 27곡 37-39행에서 단테는 옛 신화 속 커플 퓌라무스와 티스베를 언급한다. 둘의 애절한 사랑은 처음 들어서 오비디우스의『변신 이야기』에서 찾아보았다. 빼어난 선남선녀의 사랑, 아버지들의 반대, 밀회 약속 도중에 한 사람이 죽을 뻔한 도구를 만나나 죽지는 않음, 그러나 나중에 도착한 상대방은 겉으로 보이는 정황으로 연인이 죽었다고 착각하고 자결함, 이 모든 것을 목도한 후 절망하는 남은 자의 뒤 따른 죽음.

 뭔가 많이 익숙하지 않은지? 셰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들의 러브스토리에서 힌트를 얻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순전히 나만의 근거 없는 추측이다.) 짙은 자줏빛 오디 열매의 전설이기도 한 이 이야기를 짧게 소개해 본다.


퓌라무스와 티스베는 옛적 바벨론시에서 서로 이웃으로 살고 있었다.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잘 생겼고, 동방의 모든 처녀 가운데 가장 미인이던 두 사람은 사랑이 깊어졌으나 아버지들의 반대로 결혼식은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담장 사이의 구멍으로만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나직이 한탄하다가 어느 날 밤 드디어 만나기로 약속했다. 옛 왕의 무덤 근처 시원한 샘물 곁 키 큰 뽕나무 아래서.

티스베가 먼저 가서 약속한 나무아래 앉았다. 그때 암사자 한 마리가 방금 소떼를 습격해 주둥이를 온통 피로 물들인 채 갈증을 식히려고 가까운 샘을 찾고 있었다.

티스베는 멀리 달빛 속에서 그 사자를 알아보고는 겁에 질려 동굴 안으로 도망치다가 어깨너머로 흘러내린 목도리를 떨어트렸다. 사나운 암사자는 물을 실컷 들이켜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그 천을 발견하고 피투성이 입으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조금 뒤 도착한 퓌라무스는 짐승의 뚜렷한 발자국과 피로 물든 조각들을 발견하고 파랗게 질려 외쳤다.

“내가 그대를 죽였어. 내가 그대더러 밤에 이런 위험천만한 곳으로 오라고 해놓고 먼저 와 기다리지 않았으니….”

그는 목도리에 입 맞추며 나무 아래서 칼을 빼어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고, 그 피에 흠뻑 젖은 오디들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나중에 돌아와 연인의 마지막 한숨을 목도한 티스베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며 아직 연인의 피로 따뜻한 칼 위에 엎드린다.

“죽음만이 그대를 내게서 떼어 놀 수 있었지만 이젠 죽음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요. 곧 두 사람의 몸을 가려주게 될 나무여, 너는 우리 두 사람이 흘린 피의 기념물이 되도록 언제나 애도에 적합한 검은 열매를 맺도록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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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천병희 옮김, 2007, 도서출판 숲

**『신곡』단테 알리기에리 장편서사시, 귀스타프 도레 그림,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7

*** 호메로스『오뒷세이아』 천병희 옮김, 2006, 도서출판 숲

**** 오비디우스『변신이야기』 천병희 옮김, 2005, 도서출판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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