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했던 나, 비열했던 너
나는 선택적 회피형 인간이다.
감정의 충돌, 특히 언쟁을 견디지 못한다.
상처보다 무서운 건, 다툼 이후 남는 잔해들이었다. 그래서 충돌보다는 늘 이별을 택해왔다.
내가 잘못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 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줄은 알았지만,
상대가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만 느껴져도 먼저 등을 돌렸다.
상처를 남길 수 있는 말들이 두려웠고, 어색한 공기는 공포였다.
그건 결국, 비겁하고 이기적인 태도였다.
이별 후의 후회와 힘듦은 마땅히 내가 치러야 할 몫이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지만,
상대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진 나서지 않았다.
그는 내 취약함을 꿰뚫고 있었고, 늘 먼저 져줬다.
덕분에 우리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내 방식대로 회피를 택했다.
다만 이번엔—조금 다른 이유였다.
———
집으로 걸어가며, 머릿속은 복잡한 의문으로 가득 찼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없던 직원.
단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여자에게도 남자친구가 있어 보였고,
대화는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는 말도 없이 건조했다.
가벼운 장난조차 없었다.
그 대화만 그랬던 걸까?
다른 날의 대화도 있었을 텐데 지워져 있었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나는 그가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사실보다,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 괴로웠다.
예전의 그는 달랐다.
무슨 잘못이든, 내가 알기 전에 먼저 고백하던 사람이었다.
———
한 번은, 우리가 다투고 헤어진 어느 새벽이었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너의 집 앞이야... 잠깐만 나와줘. 지금이 아니면 못 할 말이 있어."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갔다.
그의 고백은 충격이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내가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도 있었다고 했다.
밤새 술을 마시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친구와 나란히 모텔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친구는 그에게 다가왔고, 그는 선을 넘기 직전까지 갔다고 털어놨다.
그 순간, 그는 "편의점 좀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와 곧장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엉망이 된 얼굴로 용서를 빌었다.
그에게 물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왜 하는 거야?"
그는 말했다.
"혹시라도 네가 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먼저 듣게 되면, 더 상처받을까 봐."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저릿했다.
나는 “가서 씻고 와.”라고 답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실수엔 한 사람의 책임만 있음이 아님을 알기에
고맙다는 말은 전하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그의 전화에 친구의 이름이 떴고, 나는 대신 받았다.
그렇게 나는 친구 하나를 버리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함에 좌절했다.
———
내가 준 마음이 비수가 되어 돌아온 날이었다.
오랜 시간 꿈속에서 그 장면 들을 마주해야 했고,
이윽고 그 찢어진 우정으로 인해 마음을 주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 나를 너무도 잘 아는 그가 지금 나를 속였다.
정말 아무 일이 없었다면,
그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
앞으로는 "집에 도착했어"라는 말조차 온전히 믿기 힘들 것이다.
그의 집 안 어딘가에 남겨진 긴 머리카락 한 올, 차 바닥에서 주운 립스틱 하나.
예전엔 그저 '누나의 것'이라며 웃고 넘겼지만, 이제는 그 말까지도 거짓으로 느껴졌다.
그 사소한 흔적들이 증거처럼 보였고,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신뢰는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런 불신과 의심에 매일을 잠식당하며 살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가 먼저, "다른 사람이 생겼어. 그만하자."라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증오와 원망이라는 감정으로 쉽게 떠나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아직도 내 안에 미련이라는 이름의 조각들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그렇게라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변명을 꺼낼지.
그의 말투와 표정까지 머릿속에 그려질 만큼 익숙했고, 그 상상만으로도 지쳐버렸다.
그래서 입을 닫았다.
‘내가 준비됐을 때 끝내자. 끝내기 전에, 받아야 할 것도 있으니까.’
———
나는 아직 이별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받아야 할 돈, 그걸 핑계 삼아 다시 연락하게 될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독촉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작은 다툼이 터졌다.
남자친구와 함께 살던 친구와 셋이 이야기하다,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인 날이었다.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명백히 그가 잘못한 일이었다.
그들의 싸움에서 내 의견이 중요해졌고, 나는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똥은 내게 튀었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한마디가, 내 귀에 깊게 꽂혔다.
———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말끝마다 눌러 삼켰던 감정들이, 그날만큼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숨 죽여 참아오던 울분이 들끓으며 넘쳐흘렀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예상대로였다.
다급하고 뻔한 변명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난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단 한순간도 변한 적 없어."
나는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아니,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사랑하는 거야."
진심까지 부정하며, 내 마음을 지워내려 했다.
후회로 남을 말들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게 두려웠기에,
언제나 다툼을 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내 입에서, 평생 듣고 싶지 않았을 말을 듣게 되었다.
"넌 그냥 쓰레기야.
냄새나는 줄 알면서도 들고 있었더니, 나까지 썩어버렸어.
내가 멍청했어. 넌 절대 바뀌지 않아."
그는 반격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내 말에 꼬리를 물며 맞받아쳤겠지만,
이날 그는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처음이잖아.
너한테 거짓말한 것도, 이런 일이 생긴 것도.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
스무 살.
이틀간 연락을 끊었던 그는, 알고 보니 채팅으로 만난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는 죄책감에 아팠다는 거짓말로 그 상황을 덮었다.
그 일이 내 귀에 들어온 건 2년 뒤,
친구의 술자리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실수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아무 말 없이 그를 용서했다.
때린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맞은 사람만 오래 기억한다.
“한 번은 실수야. 두 번은 그게 그 사람인 거지.”
그래서 다시 말했다.
“넌, 그냥 쓰레기야.”
“그러니까 제발, 쓰레기들끼리 만나.
나는 네가 그 여자랑 정말,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긴 연애의 끝이 결국, 이따위라니.
언젠가 우리가 끝나는 날엔—
영화처럼 ‘잘 지내’라는 말, ‘고마웠다’는 말 정도는
담백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 떠난 자리엔
처참한 말의 잔재들만이 나뒹굴었다.
———
나 역시 그에게 많은 잘못을 했다.
미안함이 쌓일수록 더 잘하려고 애썼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참았다.
하지만 그날의 그는 너무도 뻔뻔했다.
그 배신이 고의든 실수든, 그는 내게 더 잘했어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가 더욱 괘씸했다.
억지로라도 진심을 비춰줬다면,
나는 입을 닫은 채 이별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무너진 믿음 위에서 돌아섰다.
돈은 돌려받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큰 값을 치렀다.
사랑이 아닌 집착,
믿음이 아닌 착각을 껴안고 지낸 시간들.
결국, 그 모든 게 내 20대의 수업료였다.
그리고 다시는,
그 길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