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끝

서른의 시작

by 세하

도피처럼 떠난 부산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충만했다.

새로운 일터,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사람들.

그 낯선 조합 속에서, 나는 매일을 조금씩 회복해 갔다.


엄마와 아빠를 초대해 자갈치시장을 걷고,

해운대의 바람을 맞으며 마치 가족여행처럼 하루를 보냈다.


지영이—이별 후유증으로 무너지고 있던 친구는, 결국 내 옆으로 왔다.

해운대 뒷골목,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던 3층 빌라.

서로의 마음을 두드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한 계절을 함께 견뎠다.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과의 짧은 여행,

휴가 같은 날들이 이어졌고,

그 시절의 부산은 잔잔한 파도처럼—

내게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어갔다.


처음의 낯섦은 바다 냄새에 스며들었고,

염분처럼 살갗에 들러붙는 공기조차 이젠 익숙했다.


해운대의 저녁빛 아래,

골목마다 켜켜이 쌓인 타인의 시간들 사이로,

어느새 나의 계절도 함께 퇴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랑.


———


연애는 했지만, 깊이 빠지진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췄다.

마음보다 머리를 먼저 썼고, 감정보다 계산이 앞섰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아프고 오래가는 상처인지 알아버린 나는, 사랑은 하되, 믿지는 않았다.


믿어야 할 타이밍이 와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견딜 수 있을까?’


그 질문 하나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직전에,

항상 나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던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날 믿지 않아도 돼.

그냥, 혼자인 것보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게

조금은 덜 외롭다고 느껴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는 다시 사랑하는 법을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조용히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


평온하던 어느 날, 오래되지 않은 과거가 뜻밖의 방식으로 나를 찾아왔다.


익숙한 번호로 걸려온 전화.

받지 않고 차단하려던 순간,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

기차 안에서 찍힌 창밖 풍경. 그리고 단 한 줄.

“부산 가는 길.”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내 새로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말했다.

“네가 쓰는 쇼핑몰 아이디랑 비밀번호.

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바뀐 번호, 옮긴 도시, 잠시 내려놓았던 불안까지—

그는 나의 허술했던 어제를 타고, 현재까지 침범해 있었다.


“지금 너희 집 앞으로 가는 길이야.”


나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거절하면 정말 집까지 찾아올 기세였다.


결국, 해운대 앞의 한 카페에서 우리는 마주 앉았다.


그는 말랐고, 눈 밑은 퀭했다.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이번엔 정말 변하겠다고,

미친 사람처럼 매달렸다.


마음이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돌아서 있었다.


“나, 남자친구 생겼어.

부모님이 연결해 준 사람이야.

결혼할 사람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거짓을 섞어 말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내 심장도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거짓은 이별을 위한 내 용기였다.


그는 울었고, 나는 끝까지 눈물을 꾹 참아냈다.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나의 태도는 그의 예상과 많이 다른 듯했다.


“난 한 번도 변한 적 없어. 예전엔 널 사랑했고,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야.”


사실이었다. 그리고 고백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될 수가 있어?”


그는 끝내 이 사랑의 끝을 나의 잘못으로 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난 갑자기가 아니야. 말을 하지 않는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잖아.”


냉소적인 내 표정과 말투는 그를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내가 건넨 서울행 버스 티켓을, 그는 두 손으로 조용히 받아 들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랑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도, 나는 더 이상, 나를 지우는 사랑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


버스를 타는 그의 뒷모습이 창밖에 작게 스쳤을 때,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던 무언가가 물풍선이 터지듯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부신 햇살을 핑계 삼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젠 정말, 끝이야.’


나는 14년 지기 단짝친구를 떠나보내며

추억은 힘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여지를 주지 않는 것,

그것만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최선이자

예의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이별했다.

익숙함이었던 사람에게, 더는 익숙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그리고—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신하던 그는,

끝내 진짜 ‘나’를 알지 못했다.


———


이제 그 도시는 내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익숙함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이름 하나만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계절을 버텨냈다.


모든 계절은 지나가듯, 계약도 끝났다.

나는 다시 짐을 쌌고,

장거리 연애라는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북쪽으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서른—

다시 시작하기에, 정말 좋은 나이이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은,

오랜 시간의 파도처럼, 지나간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표정에 스며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밀려오던 물결은 점점 작아졌고,

그 리듬은 마치 “잘 견뎌냈다”는 인사처럼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


KTX는 서울역에 도착했지만,

내 마음은 아직, 바다의 끝에 머물러 있었다.


꽤 오랜 시간, 혼자서 잘 버텨왔고

그만큼 독립적으로 살아온 삶이 단단해졌기에

이제 다시 누군가와 얽히거나, 현실로 복귀하는 일이 오히려 더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어도 나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산이 나에게 회복의 시간을 안겨줬다면,

이제는 다시, 살아내야 할 시간이었다.


고된 일상과 마주하고,

사람들과 부딪히고,

때론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하겠지만…


어떤 계절이든,

결국 나를 지켜내는 건—

사랑도, 기대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이제는 잊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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