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예전 매장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부산에 있을 때도 명절이면 떡값을 챙겨주던, 정 많고 좋은 원장님이었다.
내 이기적인 푸념—어디든 도망치고 싶다는 말에
원장님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에겐 어쩌면, 필요한 선택일지 모르겠다.”
그 말은 내게 죄책감이 아닌 용기를 안겨줬고,
덕분에 나는 내 결정을, '배신’이 아니라 ‘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돌아왔으면,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그 말은—
부산을 떠날 때 이미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다짐이기도 했다.
익숙하고 따뜻한 제안이었지만,
나는 이제 그 온기에 기대어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의리를 저버리는 건 아닐까,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더 많은 사람, 더 낯선 날들을 겪고 싶었다.
그래서 정규직 대신 ‘스페어’를 택했다.
두세 날 단위로 여러 매장을 오가며 일했고,
그 자유로운 시스템은 내 성향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지역마다 고객의 성향은 달랐고,
같은 시술도 가치가 다르게 매겨졌다.
다양한 고객층과 환경을 빠르게 흡수하며
나는 분명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새로운 것에 쉽게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었기에,
그 모든 낯섦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했다.
──
그 사람—
부산에 남은 그는, 매주 혹은 격주로 서울에 올라왔다.
표정도 말투도 늘 다정했고, 약속도 책임졌으며,
사랑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였다.
보고 싶던 마음이—귀찮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일상이 너무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의 한 잔이 기다려졌고,
그의 방문은 그 자유를 덜컥 삼켜버리곤 했다.
나는 느꼈다.
마음이 조금씩 비어 가고 있다는 걸.
더 늦기 전에,
마침 그가 작은 실수를 하나 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나는 그 틈을 핑계 삼아 이별을 꺼냈다.
그는 울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다.
그 따뜻함은 마지막까지 이어졌고,
이별 인사는 마치 긴 감사의 편지 같았다.
“알겠어. 잘 지내.”
나는 양껏 사랑받았고,
그가 먼저 물러섬으로써 이별조차
그의 배려 안에 조용히 안겨왔다.
──
그 후로 한동안, 나는 일에 파묻혀 살았다.
이별의 그림자는 ‘바쁘다’는 핑계 뒤에 숨어 있었고,
나는 정말 이별했는지도 모를 만큼 덤덤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낯익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세 달 만이었다.
수화기 너머, 그가 말했다.
“너네 집 앞이야.”
등 뒤로 식은땀이 뚝 떨어졌다.
서울 남자가 했던 말을—
부산 남자가 했다.
“뭐라고?”
놀랄 것도 없었다.
매번 나를 바래다주던 그에겐
이 집 주소가 너무 익숙했을 테니까.
그날, 나는 집에 있었다.
하지만 집에 없다고 말했다.
“안 만나. 돌아가.”
“얼굴 보고 얘기하자.
너… 많이 놀았잖아. 이제 돌아와.”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숨고 싶어졌다.
‘놀았잖아’—그 말이,
내가 애써 외면해 왔던 죄책감을
단번에 끄집어냈다.
맞는 말이었기에
더 아팠고,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사랑이 남아서가 아니라,
나를 여전히 믿고 있는 그의 마음을
알고도 외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믿음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그 순간이 유난히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더 단호해져야 했다.
그의 마지막 다정함에 무너지는 순간,
그건 그에게도, 나에게도
상처만 남길 일이 될 테니까.
나는 차창 밖,
그의 차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불도 끄고, 입도 닫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사랑에 배불러 오만해진 내 모습과 마주했다.
그의 다정함 위에
나는 너무도 편안하게 기대 있었고,
그 마음을,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한껏 소비하고 있었다.
필요할 때 곁에 두고,
결국 먼저 등을 돌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미안했다.
아니, 정확히는—죄책감이었다.
벌이라도 받듯,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미 식은 마음에는
나조차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머물기 시작한 사람.
내가 힘들어 보인다며
짧은 편지를 건넸던 그 사람.
그날, 그렇게—
나의 이기심과 냉정함이
조용히 드러났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내 안의 얼굴.
결국,
모든 걸 들켜버린 남자였다.
──
그를 처음 본 건, 스페어로 나간 미용실이었다.
그는 마른 체형의 슈트가 잘 어울리는 실장이었다.
낯선 진향 향수 냄새가 먼저 다가왔고,
그 차가운 향기 너머—
말투와 리듬엔 이상하게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힘이 있었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분위기 중심엔 늘 그가 있었다.
말을 잘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재밌게’ 잘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도 그의 입을 거치면 리듬이 생겼고,
다른 남자 직원들의 후일담에 곁다리를 얹는 솜씨는 능청스럽고도 노련했다.
사실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런 생각도 스쳤다.
‘사기꾼을 해도 잘하겠네.’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투,
사람을 곧잘 웃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
그리고 자기 인생의 어두운 이면조차
마치 무용담처럼 풀어내는 기술.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로 살아온 사람’ 같기도 했다.
진심이든 연기든, 사람의 주의를 끄는 데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