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정리했어

끝을 정리한 자리에서, 시작이 찾아왔다

by 세하

세월호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엔 노란 리본이 일렁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집어삼킨 세상의 무심함이 미칠 듯이 원망스러웠다.

술자리는 부쩍 잦아졌고, 속은 자주 쓰렸다.


그런 날들 속에서,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술… 한잔 하실래요?”


“우리 둘이요?”


“네.”


뜻밖이었다.

그는 나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단둘이 술을 마실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거절할 만큼 불편하지도 않았고,

받아들일 만큼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거절할 이유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


그날 밤, 신촌의 바.

음악은 묘하게 낮았고 조명은 은근히 얼굴을 붉혔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보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의 밀도에 더 놀랐다.

가정사, 일본 고모집에서의 유년, 일방적인 어머니,
정리되지 않은 전 여자친구 이야기까지.


그는 마치 수십 년 묵은 서랍을 통째로 꺼내듯,
자신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그냥… 당신에겐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그때까진 직장 동료 사이로 선이 명확한 거리였으니까.

나는 위로도, 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비웠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묘한 합의를 했다.


"오늘부로 우리 반말하자. 친구처럼."


"그래, 오케이."


그건 사소한 전환처럼 보였지만,
그 순간 이후,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술자리가 더 이어졌고,
그는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릴 적 학교에서의 이야기, 첫사랑의 파국, 엄마한테 맞았던 날들,
그리고 다신 말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날의 기억까지.


그의 말들이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 숨은 뜻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나는 늘 말보다는 행동을 믿는 쪽이었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굳이 감정을 얹는 걸 어색해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그가 내 앞에서 말을 꺼낸다는 그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진심이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입을 통해 '존경'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어떻게 그날들을 버텼을까…?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든 날들을 지나온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가 견뎌온 시간 앞에서, 감탄보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됐다.


──


어느 날, 술기운이 가라앉기도 전에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치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라는 미래가 사라질 것처럼—

단단한 얼굴로, 오래 준비해 온 문장을 꺼냈다.


"나 사실 너한테 첫눈에 반했어. 친구로 지내긴 싫어."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미안. 난 아니야. 내가 널 만날 거면 철수를 만나지."


철수는 우리와 같은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철수를 언급한 건 감정 때문이 아니라, 적당히 거리를 둘 핑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면 충분히 선은 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더니,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너는 나랑 결혼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뭔 개소리야. 너 진짜 웃기다."


나는 웃어넘겼지만,

그 말투, 그 눈빛에서 이상하게 진심이 느껴졌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단단하고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


며칠 뒤, 매장 휴게실.

그가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오사카행 항공권 두 장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 갑자기 이게 뭐야?"


"여행. 다녀와서도 내가 친구로 보이면,
그땐 진짜 친구로 남을게."


"부담스러워. 그리고 내가 너랑 둘이 여행을 왜 가."


"그냥 여행이야. 친구끼리도 가잖아.
그냥 좀—같이 가주면 안 돼?"


"그래도 너무 뜬금없는데..."


"정 싫으면 내가 티켓줄테니까 니가 가고 싶은 친구랑 가던가."


"하아... 생각 좀 해볼게."


나는 그 표정을 잊지 못한다.

진심 반, 설득 반.

마치 ‘이 여행이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절박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고, 나는 결국 그 비행기에 올랐다.


──


처음 타보는 비행기.

낯선 땅, 낯선 간판,
처음 맡는 공기.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의지’란 걸 하게 됐다.


서울에서처럼 지리를 외우고,
길을 되짚고,
건물 생김새를 기억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 도시만큼은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의 발걸음을 조용히 따라갔다.


‘여기선 길을 잃으면 안 돼.’


그건 어린 시절 납치당할 뻔했던 기억이 만든 습관이었다.

지나치는 간판 하나, 골목 모양 하나까지 눈에 새기며 돌아올 길을 확보하는 것.

하지만 일본의 길은 서울과는 너무 달랐다.


여행 삼일째 되던 날,

문득—

모든 간판과 길을 잊어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쩐지 이 사람만 놓치지 않는다면,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였을까.

단단하다고 믿었던 마음 어딘가에, 아주 작고 투명한 실금이 생겼다.


그 낯섦 속에서,

나는 조금씩 그에게 스며들었다.


불안함과 설렘이 혼동된 떨림이었는지,

그저 한 사람을 신뢰하게 되는 감정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에 돌아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함께 걸었고, 함께 웃었고,
어느새 ‘우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 너한테 꼭 말해야 할 게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미 평범한 일상은 아닐 거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가 꺼낸 이야기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고, 잔혹했다.


──


그에게는 함께 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그의 어머니와도 함께 살고 있었다.


헤어진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처음부터 알려준 것이었다.


놀라웠던 건,
그 여자에게 5살 난 아이까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


부모에게 버려졌고, 친구의 사기로 집도 잃은 그녀는

이혼도, 아이도,

모두—그에게 말하지 않은 채
그의 어머니와 살림을 합쳤고,
말 그대로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이 속았다는 감정보다 신뢰가 무너졌다는 감각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정이 아니라 신뢰. 그게 무너졌다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


그는 이별을 말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짐을 싸지도 않았고, 떠날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끝나지 않은 관계 안에서 하루하루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점점 날 무너뜨리더라."


그 말은 슬픔이라기보단, 오랜 피로가 말의 끝에 내려앉은 한숨처럼 느껴졌다.

마치 모든 감정을 말 대신 삼켜온 사람처럼—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울렸다.


──


나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그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시작은 없어.

나는 그 중간에 있고 싶지 않아."


그는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그리고는 연락이 끊겼다.


──


이틀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 이틀이 우리의 끝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는 대부분 현재를 잡아먹는다.

특히, 함께 살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그는 기어이 돌아왔다.


"다 정리했어."


텅 빈 통장, 간절한 눈빛, 그리고 남은 건— 진심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쓰던 숟가락 하나까지 챙겨서 나갔다고 했다.


"진짜 다 가져가더라. 난 이제… 남은 게 없어."


나는 그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말했다.


"넌… 그냥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야.

내 삶은 진짜 지옥 같았거든.

근데 널 처음 봤을 때, 이상하게 그런 예감이 들더라.

‘아, 이 사람이라면 날 꺼내줄 수도 있겠다.’


나는, 그의 예감에 책임을 지고 싶어졌다.


──


사랑이 끝난 자리엔 침묵이 눌어붙는다.


그 침묵은,

때로는 사랑보다 더 오래 남는다.

더 무겁고, 더 또렷하게.


그는 그 무게를 감당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무게는 앞으로 나의 몫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에게 남은 건, 텅 빈 통장과 서로를 붙잡고 있는 손 하나였다.


──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다.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 삶. 누구도 응원하지 않던 사랑.

하지만, 그 누구보다 뜨겁고 단단하게 서로를 끌어안으며.

그 사랑은 하얀 종이에 찍히는 첫 붓질 같았고,

내가 가진 전부를 다시 그려보겠다는 조용한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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