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함께

시집살이, 그 단어의 시작

by 세하

어색함이 머무르기도 전에, 우리는 서로의 온도에 익숙해졌다.

아침 인사엔 웃음이 섞였고, 저녁이면 서로의 하루를 되묻는 일상이 생겨났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익숙해졌다.


그 남자는 사랑을 말로만 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매일같이, 자주자주 표현했다.

그리고 항상 내 마음도 확인받고 싶어 했다.


“너는 진짜 나 좋아해?” “진심이야?”


그런 질문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 사람.

그건, 내가 처음 만나는 종류의 사랑이었다.


──


어느 날, 그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보다 빠른 타이밍이었다.

비혼주의자라는 나의 성향을 그는 알고 있었고, 가진 것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둘이서만 시작해 보자.” 그가 말했다.


혼수도, 예물도, 결혼식도—형식은 나중 문제였다.

지금, 함께 살아가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나는 이상하게 그 말이 좋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그 전제가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


그리고 그 남자는 내게 세 가지 고백을 했다.


첫 번째 고백.

그가 나와 동갑이라고 했던 그 나이, 실제로는 주민등록상으로도 6살 어렸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그 나이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거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자기를 22살에 낳았다고 했지만,

고등학교 때 배가 불렀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고 했다.

게다가 출산일을 용이 승천하는 시간에 맞춰 잡았다는 말까지.

그가 추정하는 진짜 나이는, 주민등록보다 3살 많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숨을 고르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꽤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에 일찍 나왔던 그는

세대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했다.

성숙했고, 눈치가 빨랐고, 생각이 깊었다.

하지만 나로선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순간의 나로선, 그 모든 걸 덮고 갈 만큼 그가 믿고 싶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감정이, 그렇게 나를 먼저 끌고 갔다.


──


두 번째 고백은, 듣는 순간 숨이 멎을 만큼 뜻밖이었다.

그는 술을 못 마셨다.

그동안 ‘잘 마시는 척’을 한 것이었다.

소주 세 잔에도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내 앞에서는 늘 술잔을 들었다.

무심한 척, 아무렇지 않은 듯,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은 몰래 버리거나 억지로 삼킨 뒤 화장실에서 토한 거라고 했다.


나는 멍해졌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나는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게 ‘술자리’는 사랑의 일부였고, 공유하는 문화였으며,

때로는 기분을 나누는 감정의 언어였으니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 곁에서 그렇게 애썼다.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오래 묶여 있던 감정의 실이 풀리는 것 같았다.

벌컥벌컥 마시고, 어색하게 웃던 그의 모습들이

하나씩 내 안에서 재조립되었다.

모든 게 설명되었고,

그 진심은 술보다 진한 감정으로 남았다.


그런 사람도,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


세 번째 고백.

그는 매달 200만 원을 어머니께 드리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차 할부금과 보험료 명목이었지만,

나머지는 순수한 용돈이었다.


어머니는 현재 아무런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는 말했다.

“나 어릴 때부터 혼자 키워내느라 고생 많이 했어.

돈 벌면서부터 계속 지켜온 일이야.

이건 결혼해도 계속하고 싶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일을 하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그 상황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


그 순간, 우리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쉴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엄마의 손.

일을 마친 뒤에도 설거지를 내려놓지 못하는 손.

잠시라도 쉬려 하면,

어느새 아빠가 “물 좀 줘” “약 좀 찾아줘”라며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그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아직까지도 아빠는, 그 손에 전적으로 기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손을 떠올리는 일은 곧 마음 한쪽이 뜨거워지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그렇게,

누군가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내고 있었다.


한쪽 부모에게만 그런 보답을 하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혼란스러웠다.

내가 살아온 가족관과는 너무도 다른 가치가 그의 말속에 있었고,

그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문득

내가 내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입 다물고 수긍한다는 것은

마치 부모를 외면하는 일처럼 느껴졌고,

배신이라 말하면 과장일지 몰라도,

속 깊은 어딘가는 그 단어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 한쪽도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그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에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건 단지 마음가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아온 습관이었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약속 같았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벌어들인 돈을 모두 어머니께 드렸다 했다.

군 입대 전날까지도,

용돈을 챙기기 위해 일했고,

전역한 바로 다음 날부터도 그 일은 이어졌다.


그렇게 몇만 원이던 액수는

점점 올라가 어느덧 200만 원이 되었다.

직전 월급이 700만 원을 넘을 만큼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용돈을 위해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물었다.

“지금 당장 돈이 여의치 않은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빚을 내서라도 지키고 싶어...”


그건 단순한 효도가 아니었다.

그의 방식대로 살아온 오랜 다짐이었고,

그가 짊어진 무게이자, 내려놓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그만큼 더 벌게. 엄마는 나 하나 보고 살았으니까… 그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싫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내게 버거웠다.

하지만, 그건 그의 오래된 선택이었고,

내가 사랑한 사람의 일부였다.


그는 덧붙였다.

“나중에 너희 부모님께도 내가 꼭 보답할게.”


──


우리는 각자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고, 결혼을 전제로 함께 살기로 했다.

내 부모는 조용히 내 선택을 지켜보았다.

크게 반대도, 적극적인 지지도 없었다.

그 조용한 지지가 오히려 나에겐 힘이 되었다.


어른으로서 내가 선택한 사람과의 시작.

그들이 나를 믿어주는 만큼, 나도 내 선택을 믿고 싶었다.


──


돈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의정부, 그의 집 근처에 있는 무보증금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남자친구는 남은 돈을 털어 보라카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불안했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 감정보다 앞서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다음 여행은 기약이 없을지도 몰라.

우리, 곧 정말 바빠질 거야. 지금 아니면, 못 쉬어.

지금은… 그냥 즐기자.”


쉼 없이 일해온 내 인생에서,

‘쉰다’는 건 늘 죄책감과 함께 오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그의 말이, 이상하게 내 마음에 닿았다.


보라카이는 환상이었다.

현실을 잊을 만큼, 좋았다.

우리는 다녀왔고, 현실로 돌아왔다.


──


돌아온 우리는 마땅한 매장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남자친구는 꼭 같은 매장에서 일하길 원했다.

그런 조건은 구직의 폭을 좁혔고, 한 달이 지나도록 우리는 스페어 생활을 전전했다.


통장은 비어갔고, 예상보다 빨리 빚더미에 올라설 상황이 닥쳐왔다.


그는 제안했다.

“우리 집으로 들어가자. 생활비라도 줄이면, 그만큼 더 버틸 수 있어.”


그의 집.

그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

그리고…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다른 여자가 머물렀던 집.


그 여자 삶의 자취가,

아직 그 집 어딘가에 남아 있을 듯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시집살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 어디에도 없던 말이었다.


게다가, 다른 여자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공간이라니.

그 집의 공기까지도,

과거를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곳에 들어간다는 건,

그의 어제를 통째로 껴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결국, 그 과거의 문 앞에서

조용히 손잡이를 돌렸다.


20층 아파트의 마지막 층.

그곳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가진 건 없었고, 다만 서로를 향한 믿음뿐이었다.


그 믿음은, 이 모든 것의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만은, 아무리 바닥을 쳐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가장 단단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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