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버티는 것으로 증명한 사람의 이야기
그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일찍이 알았다.
그건 단지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늘 증명하고 싶어 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
그는 울지 않는 아이였다.
어머니 말로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고 했다.
밤을 새우는 날도 울지 않았고, 배가 고파도 조용히 기다리는 아이.
속 편한 아이라는 말 뒤엔, 그 누구보다 조심스러웠던 아이의 시간이 숨어 있었다.
부모는 사랑으로 결혼했지만, 축복 속에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믿고 집을 나왔고, 아버지는 어디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사람처럼 모든 걸 감당했다.
아들의 탄생은 어머니의 삶에 또 다른 빛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머니 방식대로, 아들을 최고의 아이로 만들고자 했다.
미래를 계획하는 방식도 달랐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아들과 보드를 타고, 게임기를 건넸지만 어머니는 아이의 손에 늘 문제집을 쥐여줬다.
"내 아이는 영재야."
어머니의 확신은 아들을 영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둑, 피아노, 영어, 수학…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부터 하루의 반 이상은 학원에서 보내는 아이.
99점은 실수가 아닌 실패였다.
아이가 흐트러질 때면, 회초리는 빠르게 날아들었다.
덕분에 아이는 ‘싫어요’ 한마디 없이 그 모든 걸 따라갔다.
친구들과의 시간보다 혼자인 시간이 많아졌고,
그래서였을까. 그 아이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수학은 이미 고등 과정을 풀었고, 영어는 원어민과 나눴으며, 무엇보다도 부모에게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 아이의 세상이었고, 어머니는 그 아이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 세계가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한순간이었다.
“창밖에… 다른 세상이 있더라.”
——
아이가 열세 살이던 해.
그게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아버지의 외도. 아무 예고도 없이, 아무 이별도 없이, 그는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는 무너졌다.
일 년 넘게 말을 잃었고, 그 후엔 집에서도 어머니를 보기가 힘들었다.
살았다고 해야 할지, 버텼다고 해야 할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들을 방치했다.
어린 그는 혼자 밥을 차려 먹었고, 혼자 새벽에 학원을 다녔으며,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감기를 앓았고, 어느 날은 맹장이 터져 혼자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순간, 아무도 그 아이를 찾아오지 않았다.
——
그날의 그 병실, 그 아이는 혼자서 기계음을 듣고 있었다.
심장 소리보다 느리게, 누군가의 발자국을 기다리는 그 시간 속에서 그는 한 번도 크게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두려움과 외로움은 아이에게 아주 오랜 트라우마를 남기고야 말았다.
아이는 다 자라서도 혼자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을 때면 제대로 숨 쉬기조차 힘들어졌다.
——
외할머니 집에 잠시 맡겨졌던 어느 날, 그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할머니 집 현관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곤 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지만 아무리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제야 깨달았다.
‘다시, 혼자구나.’
그렇게 두 번째로 버려졌을 때,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공부를 놓았다. 순응하던 아이는 조용히 탈주했고, 주목받고 싶은 욕망은 인터넷 방송이라는 세상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형’이라 불렀고, ‘형’이라는 호칭은 그를 어른처럼 느끼게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조금은 더 하고 싶은 걸 했다.
물론, 엄마가 제안한 직업 중의 하나였지만 파일럿이라는 적성에 맞지 않았던 꿈보다는 훨씬 좋았다.
“미용할래요.”
그는 원래,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어쩌면 그 무대 위에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끝내 그 꿈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에 목을 멜 필요는 없었다.
——
가까스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고등학교를 포기했다.
그리고 가위 하나를 들고 미용실로 들어갔다. 그게 그의 유일한 선택이자 탈출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에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땐 이미, 아들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고 아들은 말 대신 책임으로 대답했다.
“이제 내가 지켜줄게.”
어머니는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은 오랜 시간 집에만 있던 여자를 쉽게 품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팬티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조용히 두부를 썰며 그녀도 아들을 위해 견뎠다.
그는 그 과정을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버리지 않은 어머니를 향한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오래된 책임감은
마치 생계보다 더 무거운 짐처럼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사랑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려 애썼다.
떠나지 않는다는 걸, 조용히, 끝까지 증명하고 싶어 했다.
“사랑해”라는 말도, 손에 닿는 다정한 행동도, 기억해 주는 기념일과 작지만 특별한 선물들도— 사실은 모두, ‘나는 떠나지 않는 사람이야’ 그 말을 보여주기 위한, 한 아이의 조용하고 간절한 증명이었다.
나는, 아주 늦게 알게 됐다. 그 한마디에, 그 모든 세월이 숨어 있었다는 걸.
———
아무도 그에게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사랑으로 말하며 살아간다.
마치, 오래 전의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
이제, 그게 그의 방식이다.
사랑을 ‘버티는 것’으로 증명한 사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으로 사랑을 지켜온 사람.
그 사람을—
나는, 남편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그를 사랑한다는 건—
그가 울지 못했던 모든 시간을
이제 내가 대신 안아주는 일이라는 걸.
그가 끝까지 지켜온 사랑의 자리에서,
오늘의 나는 그를 안는다.
그리고 내 품이, 그가 울지 못했던 모든 밤의 대답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