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단단한 약속

반지하에서 11층까지

by 세하

서서히, 삶의 중심은 매장 근처로 옮겨졌다.


그리고 찾아온 겨울은 혹독했다.

변기와 세면대가 얼어붙고, 수도가 얼어 터진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짐을 쌌다.

매장 뒤편 골목, 해가 잘 들지 않는 반지하 빌라.

보증금 300만 원.

습기 찬 공기와 마르지 않는 빨래.

그럼에도 우리는, 미래를 꿈꿨다.


“지하라 그런가 봐. 빨래가 축축해.”


내 말에 남편은 잠시 조용하더니, 이내 말했다.

“일 년만 참아줘. 내가 널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갈게.

진짜야, 이번에도 꼭.”


나는 웃었다.

“난 지금도 좋아. 걱정 마.”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나조차도 헷갈렸다.

그저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믿고 싶었다.


──


그 약속은, 지켜졌다.

우리는 그해 가을, 11층 신축 빌라로 이사했다.


작은 방 하나였던 옥탑방,

방 두 칸의 반지하를 지나

이제는 방 세 칸에 거실까지 딸린 높은 곳.


남편은 혼자 집을 보러 다니더니, 어느 날 말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어.”


그 말이, 얼마나 오랜 시간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집을 보러 다니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주방이었다.


TV를 보던 어느 날,

내가 무심코 흘린 말—

“나, ㄷ자 주방이 좋은 것 같아.”


그날 밤, 그는

내가 좋아할 주방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검색하고,

얼마나 여러 집을 둘러봤는지를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었다.


그 차근차근한 설명 속엔

내 취향을 기억하려 애쓴 시간과,

그 시간들 속에 담긴 그의 책임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 책임감은

그날, 조용히 웃고 있는 얼굴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


우리는 처음으로 나의 부모님을 초대했다.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국을 나눴다.

그 순간, 우리의 삶이

비로소 누군가에게 ‘인정’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약속.

남편은 두 번째 매장을 열며 말했었다.


“일 년에 두 번, 꼭 해외여행 가자.

우리가 지칠 땐, 여행을 기다리면 돼.”


그 말도 지켜졌다.

비행기 티켓이 생기면 나는 가장 먼저 날씨를 검색했다.

그가 준비한 모든 여행엔

작은 이벤트와 선물이 함께 있었다.


화이트데이엔 팔찌,

결혼기념일엔 반지와 목걸이.

생일엔 내가 필요했던 것들이

어김없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아내가 아니라, 여자를 위한 선물을 하고 싶어.”


그의 말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시선만큼 따뜻했다.


“기념일엔 아내가 아닌 여자한테 주는 선물이 돼야 하잖아.”


──


한 번은, 두 번째로 맞이한 빼빼로데이였다.

늦은 밤, 꽃이 다 떨어졌다며 남편은 화분을 들고 왔다.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꽃도 아니고, 화분이 뭐야…

나 아직 실용이 전부인 아줌마는 아니거든.”


그 말을 내뱉고서야 깨달았다.

정작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그날 이후, 남편은 언제나 공식처럼 마음을 준비했다고 했다.

‘생일엔 필요한 것, 기념일엔 설레는 것.’


선물은 언제나, 미리 준비돼 있었고

그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감동이었다.


내가 무심코 흘린 말—

“저거 예쁘다.”

“이거 한 번 써보고 싶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내 손에 들어왔다.


──


남편은 항상, 내 마음을 말로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나 같은 회피형 인간은,

사랑을 말보다 ‘함께 견디는 시간’으로 증명한다.


고백 대신 곁에 머물고,

표현 대신 함께 버틴다.


그래서 나는 믿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

힘들고 지쳤던 날들을 지나며

등을 내어주고, 등을 기대던 그 시간들이야말로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가장 진심 어린 증거라고.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을 해야 알지.

어떻게 알아.

그래서 나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잖아.”


그는 매 순간, 순간들을 애썼다.


그가 보여준 사랑은

내가 알고 있던 사랑보다 훨씬 더 컸고,

그 사랑이—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그해, 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


그가 했던 세 가지 약속.


“반지하를 탈출시켜 줄게.”

“일 년에 두 번은 꼭 여행하자.”

“평생 널 여자로 대해줄게.”


그 약속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졌다.


그 모든 순간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진심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 작고 단단한 약속 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또 다른 약속을 하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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