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를 사이에 둔, 가장 조용한 전쟁
시어머니와 나는 극과 극의 성향이었다.
시어머니는
모든 말들에 숨은 뜻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표현된 말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진짜 마음은 그 너머 어딘가에 숨어 있었고,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아는 사람’이라 여겼다.
반면 나는,
말이라는 걸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좋으면 웃었고, 싫으면 말이 줄었고,
무슨 뜻이든 말보다는 행동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게 내 방식이었고, 그래서일까—
시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늘 한 박자 늦게 눈치를 챘다.
말보다 표정을 먼저 떠올리며 의미를 되짚어야 했다.
그건 단순한 세대 차이도, 취향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녀는 수십 년을
세상을 상대로 싸우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싸움 끝에 남은 건,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는 습관 같은 불신이었다.
———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왜 장모님한테 그렇게 말이 편해?”
“무슨 소리야?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편해.
엄마한테 굳이 불편하게 말할 필요가 있어?”
내 말에 남편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우리 엄마한테 말할 때가 제일 불편해.
그래도 당신, 조금만 더 예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이 어머니를 ‘불편하다’고 느낀다는 건
어딘가 낯설고, 의아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내가 엄마에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던 건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나에게는 말 이상의 위로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드러내도, 실수를 해도,
그 모든 걸 껴안아줄 단 한 사람.
내 흠까지도 가볍게 품어줄 수 있는 사람.
내게 엄마는 그런 존재였고,
그래서 나는 말에 ‘감춰진 뜻’보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믿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나에겐 아무렇지 않았던 말 한마디, 무심한 표현 하나가
그에겐 숨은 뜻을 가진 ‘의도’로 읽혔고,
때론 경계해야 할 말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툭 던진 말에도
남편은 그 의미를 곱씹었다.
내가 예쁘다 하면 나중에 몰래 선물을 사다 주었고,
힘들다고 말하면 본인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며칠이고 혼자 고민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표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는 나를 향해 애썼다.
그의 그런 성향은 평소엔 나를 지치게 하기보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하지만 다툼이 있을 땐—
그 섬세함이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
시어머니는 혼자였다.
남편은 그 집에서 오랜 세월 자라났고,
나는 누군가의 아내로서 그 집에 들어갔지만—
결국엔 하나의 여자로, 그녀와 마주해야 했다.
사실 처음 그 집에 들어설 땐, 기대도 있었다.
말이 통할 것 같은 젊은 시어머니.
명절도, 제사도 따로 지내지 않는 시댁.
혼자 계신 시어머니라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근데 말이야… 시어머니 앞에서 너희 너무 다정하게 굴진 마.
괜히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어.
혼자 사는 사람 옆에서 둘이 다정하면,
그게 외로움으로 느껴지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은 내 오만과 편견 앞에서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시어머니 앞에서 남편에게 잘하면, 오히려 더 좋아하지 않을까?’
내 자식이 행복한 게, 부모에겐 제일 기쁜 일이잖아.
듣지 않은 자의 후회는,
생각보다 빨리, 조용하고 뾰족하게 스며들었다.
언젠가부터, 남편에 대한 대화 속에
시어머니의 말투가 조금씩 달라졌다.
“내 아들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그 말은 매번 웃음 섞인 농담처럼 흘러나왔지만,
반복될수록 나를 향한 선 긋기처럼 느껴졌다.
말끝에 살짝 묻어 나오는 뉘앙스.
‘그래봤자 너도, 지나간 여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기시감.
그건 분명히 말은 아니었지만,
마치 말보다 더 뚜렷한 감정처럼 가슴에 박혔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마주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말이 다 불편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는 말에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쌓였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문득—
잊고 지냈던 ‘눈치’라는 감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
우리는 끝내 함께할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우린 대출을 받았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
권리금 3천만 원.
망한 미용실의 자리에 들어갔다.
밖엔 간판 하나.
‘한국에서 가장 저렴한 염색’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소셜 마케팅을 돌렸고, 그건 대박이 났다.
손님은 쏟아졌고, 우린 하루 12시간 이상을 서서 일했다.
시어머니도 이른 아침에 나와서 매장청소를 도왔다.
너무 힘들던 어느 날은, 샴푸를 하다 말고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스스로를 다잡는 다짐들이 버거울 때면
손님이 다 빠져나간 밤, 텅 빈 미용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터져 버릴 듯한 가슴을 부여잡던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아무 말 없이 손끝으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그런 날들을 이 악물어 버텨냈고,
첫 오픈 10개월 만에 드디어 두 번째 매장을 열 수 있는 자금을 마련했다.
남편은 약속했었다.
“딱 1년만 버텨줘. 그때가 되면,
우리도 남들처럼 장사하자.”
그는 그 약속을 지켜냈다.
우리는 첫 번째 매장을 정리하면서 두 손을 마주 잡고
펑펑 울었다.
“결국, 우리가 해냈어. 우리 둘이라서 할 수 있었어.”
그리고 며칠도 쉬지 않은 채 두 번째 매장을 오픈했다.
역세권의 신호등 앞 2층 미용실.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는 창가에, 우리를 도와줄 스텝 두 명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발전이 없던 단 하나, 고부사이.
———
나는 미용사다.
수많은 손님을 대하며 어른을 대하는 법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의 생활은
내가 얼마나 ‘모르는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종종 시어머니의 말에 숨은 뜻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고,
그 태도는 오해로 번졌으며, 때론 예의 없음으로 읽혔다.
시어머니는 내 뒷모습에서 무례를 찾았고,
건조한 말투에서 냉소나 무시를 느꼈다.
남편에게 말했다고 했다.
“쟤는 나를 무시한다.”
나한테는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늘 남편을 통해 이야기했다.
나는 억울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남편이 알았으면 했다.
그래서 변명했고, 해명했지만
내 진심이 무엇인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듣는 사람이 그렇게 들었다면 그렇게 말한 거야. 말할 때 좀 더 조심해.
우리 엄마가 유별나긴 한데, 너도 평범하진 않아.”
이 말은 우리의 다툼에서도 종종 나오는 말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말을 조심하는 것보다 말을 줄이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를 칭찬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말이란 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거야.”
그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에 대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삶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의 다정함은 스스로 배운 마음이었고, 존경스러운 그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남편과는 달랐다.
나는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극단적 유형의 사람이었다.
상대만을 위한 말은, 예의가 아니라 위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시어머니와 나 사이엔
이미 말이 오가지 않았다.
말은 거의 어머니 쪽에서만 흘러왔고,
나는 그 말끝에 응답하지 않았다.
오가는 건 오해뿐이었다.
남편은 그 사이에서
무던히도 중립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 무던함은 곧 지침이 되었고
나는 그의 고단한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중립이 때로는 가장 잔인한 거리 두기일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사이가 아니라
같은 남자를 두고 서로 끌어당기는
두 여자가 된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남편은
줄타기를 하듯 균형을 맞추려 애썼고,
그 줄은 날마다 점점 더 가늘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한 번의 큰 파국을 맞았다.
⸻
두 번째 매장으로 출근하던 어느 날 아침,
시어머니가 날 부르셨다.
“앞으로 날 엄마라고 부르지 말아라.”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냥 누구 어머니라고 불러.
우리가 엄마라고 할 만큼 가까운 사이 아니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마치 돌멩이 하나를 삼킨 것처럼 가슴에 턱, 하고 박혔다.
출근해서 하루 종일 멍한 얼굴로 일하다가,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너 남편이 언제까지 너 옆에서 네 편이란 보장이 있니?
걔도 남자야. 걔도 변한다고.”
그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동안 시어머니가 내게 남편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나는 일부러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상처가 될까 봐, 어머니와 멀어질까 봐.
하지만 그 말만은—
그 한마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모두 말했다.
그날 밤 퇴근 후,
남편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가지 말자.
나는… 그냥 너 하나만 보고 갈래.”
그건 선언이었다.
누구의 며느리도 아니고, 누구의 아들도 아닌
그저 ‘우리’로 살아보자는 결심이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우리는 진짜로 ‘우리만의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 매장 위층으로 빈 옥탑방 하나가 있었고
건물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주를 허락했다.
허름한 단칸방이었지만,
그날 창밖으로 보이던 별빛은 유난히 반짝였다.
그날 이후, 남편은
매일아침 어머니에게 굿모닝 안부를 전했고
주에 한 번, 혼자 어머니를 찾아갔다.
나는 가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내게 연락하지 않기를 당부하며 말했다고 했다.
“앞으로는 그냥, 아들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고 사세요.”
대신 매달 드리던 용돈은 변함없이 보냈다.
마음이 끊어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우린 그제야 결혼을 증명하는 혼인신고서를 작성했다.
———
그는 그 집을 나올 때,
눈에 보이는 건 하나도 버리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엔 지울 수 없는 무게를 남겨두고 나왔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온 시간,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져 온 감정들,
‘아들’이라는 정체성까지—
그는 모두 거기에 내려놓고 나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그는 가끔, 아주 조용한 밤에 이런 말을 꺼냈다.
“나는, 엄마까지 버렸어.”
그 말은 내게 송곳 같았다.
잠시 멍해졌고, 마치 누군가를 빼앗아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말을 이해했다.
그건 후회도, 원망도 아닌—
단지 자신이 감당해 온 무게를
처음으로 내려놓으며 내쉰, 깊은숨 같은 말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가 몇 번이나 스스로를 의심했을지,
얼마나 스스로를 미워했을지
나는 안다.
그래서 더는 그가
혼자 죄책감을 품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도 버린 적 없어.
그저, 지금은 당신 자신을 살고 있는 거야.”
사랑은 때때로, 서로를 붙드는 의지다.
그건 단순한 감정이나 설렘을 넘어,
어떤 순간에도 이 관계를 지켜내겠다는 다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상처를 마주한다.
상대의 아픔을 알면서도 등을 돌리지 않고,
함께 그 고통을 감당하려는 자세—
그게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사랑은 좋을 때만 나누는 감정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도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곁에 있으려는 의지였다.
그리고 그 의지는, 우리를 수없이 무너뜨린 현실 속에서도 다시 서로를 향하게 하는 내면의 약속이었다.
———
우리는 그렇게,
한 번도 쉬운 적 없던 길 위에서
하나씩, 조심스레, 그러나 단단하게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다시, 처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