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냄새_1

그날, 나는 없었다

by 세하

스물아홉.
나는 가위 하나만 들고, 모든 걸 끊어내려 부산으로 내려갔다.


누구도 없는 도시. 어떤 인연도 닿지 않은 거리.
그건 여행이 아니었다.
첫사랑이라는 집착을 도려내기 위한,

인생 최초의 수술이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반복했다.
사랑했고, 싸웠고, 이별했고, 다시 만났다.
어릴 땐 결혼까지도 꿈꿨다.
너무 좋아했으니까. 누구나 그렇듯,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에 대해 더 알게 될수록 알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아졌고,
결혼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함께 그려지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봐도 모르는 게 남자라면,

누구도 믿을 수 없겠다.’는 극단적인 결론까지 도달한 나는,

결국 ‘비혼’이라는 선택지까지 마음속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이별의 이유.


그는 카드게임을 했다.

단순한 취미의 선을 훌쩍 넘긴, 일종의 도박이었다.
딸 때도 있었지만, 잃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게 손을 벌렸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고,

조금씩 빌려준 돈은 300만 원을 넘겼다.


그렇게 염치없던 그는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저질렀다.


———


데이트가 잡힌 날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답장 없는 메시지창만 덩그러니 남았다.

30분, 한 시간.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사람이었다.


조바심 끝에, 나는 결국 택시를 잡아탔다.
그의 직장 근처. 익숙한 매장은 불이 꺼져 있었고, 문도 잠겨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불안한 상상을 밀어냈다.


그 찜찜함을 안고 번화가를 걷던 중,

한 식당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옆얼굴이 보였다.
회식 자리였다.

‘갑자기 회식이 잡힌 거면 말이라도 해주지...’
별일이 아니라는 안도와 함께,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렸다.
손을 뻗더니, 휴대폰을 뒤집어 테이블에 툭 내려놓았다.

한 번 더 걸었다.
같은 동작. 다시 뒤집힘.
마치 내가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나는 문 앞까지 가서 창 너머 그를 노려봤다.
두리번거리던 눈이 나와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의자에서 휘청거렸다.
창 너머로 검지 하나를 들어 손짓했다. ‘나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식당 문을 밀치고 튀어나왔다.


그가 나오는 동안,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자와도 시선을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 처음 보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뻔한 핑계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말은 빠르고 군더더기 없었다.

머리가 빠른 사람 특유의 침착함.

당황하지 않았고, 나보다 먼저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스쳤다.

‘이런 거짓말, 처음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식당 안. 사람들의 시선.

나는 웃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입꼬리만 올린 채, 마음을 꼭 다물었다.


때 마침 직장 동료들이 나를 안으로 불렀고,

그와 나란히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옆 테이블로 돌아앉아 있었다.

조금 전,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얼굴.

지금은 잔을 들고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소리는 정제돼 있었다.


잔을 드는 손끝에도,

말끝에도

어딘가를 의식한 듯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함이 스몄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뭔가 이상하다’는 감각.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를 더 다정하게 대했다.

팔을 가볍게 얹고,

말끝에 익숙한 애칭을 붙였다.


그 순간, 내가 내 표정을 조율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건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한 조용한 메시지였다.


‘보이지? 내가 여기 있어.’

그 말을 눈빛에 담아,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도 눈치를 챘는지 짧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말수는 줄었고,

잔을 만지작거리거나 비운 그릇을 괜히 건드렸다.

손끝이 조금씩 분주해지는 모습에서,

나는 그가 어딘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내 옆에 있었지만,

완전히 이 자리에 속해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멀쩡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한 불안이 느껴졌다.


———


회식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우리 둘은 먼저 일어났다.


소주 세 병과 안주거리를 사서 그의 집으로 갔다.
그곳엔 그와 같이 사는 친구도 있었다.
셋이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 낯선 얼굴을 떠올렸다.


남자친구는 피곤하다며 먼저 잠들었다.
그리고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그 여자의 얼굴이 박혀 있는 프로필 사진.
둘의 대화는 하루 치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내용은 강렬했다.


두 사람은 모텔에 갔다.
모텔에서 먼저 나온 그가 여자에게 보낸 내용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돼.’
첩보 영화를 찍듯 남겨져 있던 말.


그럴 만도 했다. 그 모텔은 그들의 직장 근처였으니까.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봤다.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간절하게 부정하고 싶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점점 또렷해지며 뇌리에 박혀 들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감각이 발끝까지 가라앉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익숙함 위에 짙은 이질감이 내려앉았다.

평온한 표정 너머로 감춰진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렀다.

믿었던 얼굴이 뒤틀리듯 변해갔고, 마치 악마를 마주 한듯한 소름이 온몸을 휘감았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대로 그의 얼굴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지만,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휘청였다.

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은 뜨겁게 일렁였고, 감정은 어딘가에 걸린 듯 흐르지 못했다.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눈앞은 맑았다.

억지로 삼킨 숨만 몇 번, 가슴께에서 무겁게 흔들렸다.

휴대폰을 원래의 자리에 두고, 조용히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가운 겨울 냄새에

울컥했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거리 위로,

나도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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