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팀목은 말없이 존재하는 법
스무 해 넘는 삶을 버텨오며 몇 번이고 세상을 원망했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하고
바랐던 순간도 또렷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원망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띠기 시작했다.
분노는 감사를 닮아갔고, 슬픔에 무뎌지는 법을 익혔다.
위태로운 순간은 많았지만
그로 인해 알게 된 것들도 있었다.
납치당할 뻔했던 어린 날, 나는 아빠의 품으로 지켜졌고 보영이의 용기로 구조되었다.
가족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삶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끝내 누구도 나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믿게 됐다. 하늘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죽을 만큼 아팠지만— 이상하게도, 결국 견딜 수 있는 고통만이 나를 찾아왔다.
⸻
엄마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묵묵히, 변함없이. 내가 잘못해도, 방황해도 단 한 번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아빠는 늘 내게 엄지를 들어 보이던 사람. "너는 최고야." 그 말 하나로 세상을 견디게 해 준 사람.
어렸던 동생은 함께 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고 서로의 상처를 꺼내 보이며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곁을 지켰다.
나는 그렇게 감사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하는 법도, 사랑을 받는 법도 서툴렀던 내가 시간 속에서 배운 건—
그것들을 지키는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
하지만 모든 경험은 흉터를 남긴다.
나는 또래보다 먼저 독립을 택했지만 혼자일 때 만큼은 꾸준히 무서웠다.
단 100미터를 걸을 때도 열 번쯤 뒤를 돌아봤고, 집에서 멀리 벗어나는 외출은 꺼려졌다.
늦은 밤의 택시는 작은 모험이었다.
언젠가, 술에 취한 채 택시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10분 거리, 익숙한 길이었다. 도착했겠지 싶어 눈을 떴을 때— 낯선 거리. 낯선 풍경.
본능적으로 경찰에 신고했고 그날은 내 안에 또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 흔한 클럽 한 번을 가보지 못한 채 20대의 조심스러운 독립을 계속 이어갔다.
⸻
그리고 내게 남은 건,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확신 같은 불안.
그래서 나는 오늘을 미루지 않았다.
"오늘 하고 싶은 건, 오늘 해야 돼." 그게 내 방식이었다.
월급은 들어오자마자 사라졌다.
꼭 지켜야 할 약속들만 지켰고,
그 외의 사치엔 늘 무심했다.
저축은 늘 먼 나라의 언어처럼 느껴졌고,
서른 가까이 된 지금,
내 통장에 남은 건 보증금을 빼고 500만 원 남짓.
부끄럽지만— 그게 내 현실이었다.
⸻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이제 결혼할 때 아니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나의 연애를 지켜봤고, 어떤 남자들과 어떤 순간들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결혼할 거라 믿고 있었을 테다.
오래된 남자친구의 부모님 역시도 내가 며느리가 된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결혼해 살 집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웃음으로 대답했고,
속으로는 '세상엔 공짜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거였다.
나는 부모의 손을 빌려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10년이 넘도록 엄마와 아빠는 '일'이라는 걸 하지 못했다.
아빠는 사고 후유증으로 긴 재활과 치료를 반복했고, 엄마는 아빠 곁을 지켜야 했다.
병원으로, 요양병원으로, 다시 집으로— 그 모든 동행 속에서, '경제활동'이라는 말은 엄마의 사전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생활은 멈추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 아빠의 장애 보조금, 그리고 그동안 벌어 모아두었던 적금과 보험금 일부.
엄마는 그 얼마 안 되는 금액들을 지푸라기처럼 움켜쥐고 숫자와 날짜를 무기로 삼아 한 푼 두 푼을 악착같이 지켜냈다.
그렇게 10년. 그녀는 한 번도 단정한 머리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누가 봐도 믿기 어려울 만큼,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엄마는 가족의 삶을 조금 더 나은 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동생은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가정에 경제적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밤엔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주말엔 조용히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그 모든 장면 속에서 나는 늘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는 늘, 혼자서도 가정을 굴리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내 비혼에 대한 확신은 그런 가정형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단지, 한 숟가락을 얹었을 뿐이다.
⸻
나는 정말 많은 사랑을 했다. 그리고 그만큼, 실망도 했다.
어떤 이는 손에 쥔 책임보다 말이 앞섰고, 어떤 이는 자신의 삶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내 어깨에 기대기만 했다.
사랑이라 하기엔 일방적이고, 관계라 부르기엔 무거운 감정들이었다.
나는 그런 사랑들을 겪으며 배웠다.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멈추는 것도, 모두 내가 나를 더 깊이 사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걸.
내가 원하는 사람은 아빠 같은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줄 알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며 가족을 향해 "잘 될 거야"라고 말할 줄 아는 긍정적인 사람.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남자는 없었다.
아빠는 그냥, 아빠였다.
⸻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을 누구에게 기대어 함께 가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도, 우정도, 모든 감정에 균형을 둔 채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나를 단단하게
조율하는 법을 배웠다.
"피해 주지 말고, 피해받지도 말자."
그건 나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
내가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말은 아빠의 그 말이었다.
"난 너를 언제나 믿어."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나는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애썼다.
비혼을 선언한 그날, 나는 그 믿음에 작은 금을 냈다는 걸 알았다.
그날의 아빠 눈빛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고인다.
⸻
남자들은 군대를 마치고 나면 흔히 말한다.
"내가 군대도 갔다 왔는데, 이걸 못 하겠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모든 걸 견뎌냈는데, 이걸 못 하겠어?
그래. 나는 견뎌냈다. 울면서도, 숨 막히면서도, 버텼다.
내 삶은 이제 돌아가고 싶은 날들이 아니라 나의 자존감을 붙들어준, 강한 증명들로 쌓인 시간들이다.
⸻
그리고 지금. 나는 나를 믿는다.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연인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나는 나로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있었다.
그게, 내 인생의 가장 정직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