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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석 Feb 07. 2023

조선해관은 어떻게 창설되었나

- 묄렌도르프와 청나라에서 온 외국인 창설 요원들 --

 1883년 6월 16일 제물포 해안에 한 척의 증기선이 도착했다. 청나라 해관선 Pechili(直隸, 직례) 호로 이 배에는 스트리플링 등 서양인 13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이들이 해안에 상륙하던 상황과 모습이 제물포 주재 일본 영사가 본국에 보낸 동향 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들이 조선에 오게 된 것은 연초에 상해에서 묄렌도르프와 맺은 조선해관 채용계약에 의해서였다. 


묄렌도르프는 신설된 조선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협판으로 청나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 조선해관 창설에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1883년 1월 22일부터 4월 10일까지 민영익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 왔었다. 이때 주로 중국 상해 해관에서 근무하던 서양인 24명, 중국인 3명, 일본인 1명 등 총 28명의 해관 요원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출장에서 돌아온 묄렌도르프는 4. 24일 고종으로부터 조선해관 총세무사직을 임명받고 상해에서 고용계약을 맺은 스트리플링 등에게 서신으로 조선해관 임명 사실을 통보했다. 이렇게 하여 6.16일에 제물포 해관 세무사로 내정된 스트리플링 인솔하에 13명이 단체로 조선에 들어왔다. 묄렌도르프가 청의 직례 총독 겸 북양대신 이홍장의 추천으로 1882년 12월 조선에 파견된 지 7개월 만에 조선해관 창설 요원들이 1차로 제물포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 해관 창설요원들은 서울로 올라와 묄뢴도르프를 만나고 바로 서울 박동 총해관과 인천, 원산, 부산해관에 분산 배치되어 업무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1883년 6.16일 인천해관을 시작으로 6.17일에는 원산해관, 7월 3일에는 부산해관이 차례로 창설되었다. 이때 고빙된 해관원에 의해 운영된 초기 조선해관의 운영 특성을 보면 첫째, 조선인은 해관의 하위 잡급직에 소수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이 관세와 해관업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어 당시 사정으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둘째, 서양 출신자들은 청국 해관에서 다년간 해관 실무를 익힌 유경험자들이라 도착 즉시 현업에 투입될 수 있었으며, 셋째, 이들 서양인 해관원들의 국적을 보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러시아, 노르웨이인 등 서양인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그 외는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나타나 당시 열강들의 세력 판도를 엿볼 수 있다.       


 묄렌도르프 고빙의 직접적인 계기는 관세 문제 때문이었다. 조선은 병자수호조약(1876.2)으로 개항은 했지만 일본과 무관세 무역이 5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는 1876년 8월에 합의한 조일무역규칙에서 일본에 대해 무관세를 허용 때문으로 당시 조선이 관세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일본 측의 기만과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던 차 최초로 관세 자주권을 인정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조약체결 1년 후인 1883년 5월 19일 자로 비준교환과 함께 발효될 것이 확실시되자 수세 업무를 맡을 해관 설치가 현안 문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정세로 조선 정부는 통상문제와 해관 설치 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이홍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이 일본과 통상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관세도 징세하지 못하고 있다 하면서 앞으로 있을 미. 영. 독. 각국과의 통상교섭을 담당할 인사와 해관 설치 및 외교담당 고문이 필요하다며 일찍이 중국 해관에서 근무 경험이 있으며, 한문과 영어를 잘 알고 외교관 경험도 있는 묄렌도르프를 고종에게 천거했던 것이다. 이때 묄렌도르프가 조선 국왕의 고문겸 해관총세무사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천진 외교가에 퍼지자 그의 숙소에는 조선에 진출하려는 상인과 아들의 취직 부탁하려는 중국 관리들의 줄을 이어 찾아왔다고 한다. 


이홍장이 애초에 조선이 원하던 청나라 사람이 아닌 묄렌도르프를 추천한 것은 자국인 추천에 따른 열강의 반발과 의심을 불식시킬 수 있으며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을 묄렌도르프를 통해 견제하려는 의도가 컸다. 또한 조선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선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세기말 해관은 대외통상 기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외교와 재정을 통제할 수 있는 주요 기관이었다. 열강은 자국의 국익에 유리한 인물을 조선에 보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우선 청국 해관에서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던 총세무사 영국인 하트(Robert Hart)가 반대했다. 그는 묄렌도르프의 모국인 독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자신의 모국인 영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했다. 실제로 하트는 자신이 조선에 보낼 인물을 이미 선발해 놓고 있었다. 또 북경주재 미국 공사 영(Russel Young)의 반대도 문제였다. 그는 이홍장이 중국이나 여타 지역에서 별다른 외교직 경력이 없는 인물을 선발하여 이홍장의 지시에 순종하도록 하려고 한다며 그 자리에 미국인을 보내기를 원하여 묄렌도르프를 반대하고 나섰다.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는 조선에서 목인덕(穆麟德), 목참판 불리며 통리아문 참의ㆍ외아문 협판ㆍ해관 총세무사ㆍ전환국 총판 등의 직책을 맡았다. 조선 해관은 1883년 창설된 후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될 때까지 22년간 약 100여 명에 달하는 외국인 해관원들이 근무했었다. 이들은 당시 빈약한 조선 정부의 재정 속에서도 고임금을 받았다. 1885년 인천주재 일본 영사가 조사한 인천해관 월급 내역을 보면 영국인 해관장 $380, 조선인 정식 해관원 $15로 외국인 보다 1/5~1/25 정도로 크게 차이가 있었다. 당시 해관장 두 달 치 월급으로 양관 1채를 구입할 수 있었다니 그들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임금을 받았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조선해관의 수입은 외국인 해관원 월급에도 못 미친다고 적고 있어 고용 외국인 해관원들에게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2대 조선해관 총세무사 메릴의 청국 해관 예속기부터는 청국 해관으로 부터도 급여를 이중으로 받았다. 이때 이들은 청국의 상해 해관 소속 신분으로 조선 해관에 파견 형식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근무를 마치면 대부분 청국 해관으로 원대 복귀했다. 이런 체제는 궁극적으로는 청국 해관에 조선 해관이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묄렌도르프가 3년 정도의 짧은 기간(1882.12~1885.10) 중에도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헐버트가 “묄렌도르프는 10명의 일을 해냈다”라고 말한 것처럼 외교, 해관, 양잠, 농업, 광산, 교육, 의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많은 사업에 착수한 점이나 청ㆍ러ㆍ일 삼국을 통한 다변화 외교로 청의 간섭이나 청국 해관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 해관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등 조선의 자주를 위해 노력했던 점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는 관세 협상에서 일본에 상당한 경제적 특권을 부여했다. 이를 두고 미국 초대 공사 푸트는 조일장정세칙이 조선의 외아문에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묄렌도르프와 일본 공사 다께조에가 일본 공사관에서 정한 것이며, “다께조에가 반드시 아첨을 하여 목씨(묄렌도르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목 씨의 정신을 취하게 함으로써 맥주 한 잔에 다께조에가 좋아하는 대로 1조를 정하고 두 잔에 일본에 유리하게 2조를 정한 것이다.”라고 그를 비난하고 있다. 영국과 맺은 조영 조약의 경우 조미조약보다 훨씬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다. 관세율만 보아도 조미조약의 절반 정도 낮게 책정되어 최혜국조관에 따라 미국, 독일, 러시아 등에 균점 되었다. 이에 대해 개화파인 홍형식은 “미국이 우리와 조약 할 때는 순조로웠고 공정하였는데 목야(목인덕)가 조영 조약에 참여해서는 우리의 권리를 많이 잃게 되었다.”라고 비난하였다.      


 묄렌도르프가 조선에서 보낸 3년 기간은 열강이 자국의 이익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격동의 시대였다. 개화파 김옥균과는 당오전 발행과 일본 국채 도입을 둘러싸고 극심한 대립을 보였다. 미국 공사 푸트는 그가 “조선 왕이나 조선 정부“처럼 행동한다고 불평했다. 또한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국인 독일계 기업인 세창양행에 각종 이권과 혜택을 주기도 했다. 그가 고용한 외국인 해관원 총 32명 중 10명이 독일인이었고 전환국과 다른 분야에서도 독일인들이 눈에 띄게 많이 진출했다. 미국 공사 서리 포크도 그가 모국인 독일을 위해 일한다고 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 곳곳에서 그를 공뇌(빈머리), 잡인이라고까지 혐오했다. 개화파 홍형식이나 김옥균 등도 묄렌도르프의 민씨 척족 편향의 친청 정책을 비난하였다. 또한 여러 개혁사업과 조러 비밀협정 추진 과정에서 독단적인 일 처리로 김윤식 등 조정 대신들의 극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묄렌도르프의 친러 비밀 외교가 알려지자 러시아와 세계 곳곳에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으로 충돌하던 영국의 반발을 샀고 이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이어졌다. 제1차 조러 밀약설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책임 추궁의 궁지에 몰린 고종은 선수를 쳐 이홍장에게 묄렌도르프의 해임과 소환을 요구하여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1885년 7월 묄렌도르프는 외무 협판직에서, 9월에는 해관 총세무사에서, 10월 전환국 총판직에서 해임되고 청으로 소환되었다. 조선에서 밀려난 묄렌도르프는 천진에서 이홍장의 밑에서 뚜렷한 직책 없이 머물면서 청의 해관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조선에 복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그의 후임으로 이홍장에 의해 조선에 파견된 외교 고문 미국인 데니(O. N. Denny)가 조선 내 청 관원들의 전횡에 항거해서 청한론(China and Korea)이라는 책을 간행하여 국제법을 원용하면서 조선이 청의 속방이 아님을 역설하여 청의 분노를 사게 되자, 묄렌도르프는 이를 반박하는 반청한론(데니 씨의 청한론에 대한 답변)으로 청 측에 영합하여 다시 조선으로 복귀할 기회를 노렸다. 군주론으로 메디치가의 환심을 사 공직에 복귀하려던 마키아벨리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후 데니가 제2차 조러 밀약 추진으로 위기에 몰리면서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다시 보내려고 했는데 하트가 반대하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고종을 설득하여 데니가 유임되면서 그의 희망은 무산되었다. 실제로 그는 1888년 5월 14일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와 약 2개월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접촉하면서 복직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다


 이후 묄렌도르프는 1889년 한직인 상하이 해관 조책처(통계국) 국장으로 있으면서 만주어에 관한 저술을 내는 등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중국 지부장으로도 활동했다. 부인과 자녀들이 독일로 떠난 뒤 1901년 54세에 닝보(寧波)에서 사망하여 상해에 묻혔다. 묄렌도르프와 외국인 해관원들은 조선에 선진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고 근대 해관 법규 및 제도를 정착시키는 등 긍정적 평가와 달리 많은 비판도 함께 받고 있지만, 그들이 격동의 개항기 조선의 개혁을 위해 힘쓴 것은 사실이다  조선해관은 묄렌도르프와 외국인 해관원들에 의해 1883년 6.16일 인천해관을 시작으로 6.17일에는 원산해관, 7월 3일에는 부산해관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의 관세행정은 그와 청에서 온 외국인 해관원들의 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도서     

신복룡, 최수근, 김운경 역주,  묄렌도르프 자서전, 반청한론/

                            청한론, 데니의 서한집, 집문당, 2019

송병기, 국역 윤치호 일기 1,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1

윤광운, 김재승, 근대조선해관연구, 부경대학교 출판부, 2007

최성연, 開港과 洋館 歷程, 경기문화사, 1959     

  논문     

윤광운, 김재승, 1883-1900년 조선해관의 고빙 해관원에 관한 연구 2006

고병익, 穆麟德의 고빙과 그 배경, 진단학보 1964

송지연, 1880년대 외국인 고문관 묄렌도르프에 대한 일고찰 1995

전홍찬, 한성무, 구한말 묄렌도르프의 친러정책 2020

이예지, 1880년대 천진해관을 통해 본 조청 관계 2012

부정애, 조선해관의 창설경위  서울大學校 한국사학회 1973     

                     

   조선 관복을 입은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년 2월 17~1901 4월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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