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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린 내가 해낸 것.

모든 대단한 사람들에게

by 이지현

성취감, 벅차오름,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 그 기억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다시 도전하게 한다.


sns를 보다가 집 근처에서 걷기 축제를 한다고 티켓을 구매하라는 광고를 보고 바로 결제했다. 단조로운 일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스스로 응원하자고 말했는데 뭔가 하는 게 있어야 칭찬도 하고 응원도 할 것 아닌가.


걷기 축제에서 16km를 완주하기 위해 두 달 전부터 걷는 것을 연습했다. 16km를 4시간 안에 완주해야 했기 때문에 조금은 빠르게 걸어야 했다. 워낙 느리게 걷고 운동도 안 했던지라 운동복을 입고 신발을 신고 나가기부터가 어려웠다. 햇빛은 어찌나 따가운지.. 매일 운동복을 입고 양말을 신은 채 침대에 누웠고, 눈 뜨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두 달 조금 걸었더니 16km는 도전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발에 물집이 잡혀도, 기어서라도 완주만 하자는 생각이었다.


8월 31일 토요일 밤 10시, 사람들과 함께 출발선에 서서 숫자를 세며 폭죽소리를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였지만 하나같이 기대와 떨림을 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설레는 마음을 안고 풀벌레 소리와 사람들의 재잘거림을 배경음악 삼아 걷기 시작했다.


6km 지점까지는 정말 신나게 걸었다. 적당히 시원하고, 땀도 안 나고, 풍경도 예쁘고. 그냥 이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꿈같았다. 안개가 조금 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8km쯤부터는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경쾌한 리듬은 사라지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42km, 24km 코스를 이미 뛰어서 갔다 온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며 걷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나는 16km도 힘든데..' 마음을 다잡으려 처음 이 축제에 신청했던 이유를 떠올리며 걸었다. 안 될 것 같았던 것을 끝마치고 난 뒤에 몰려오는 기쁨. '다시 느끼고 싶어.'


13km까지 걸었을 땐 발이 불타는 것 같았다. 뜨겁고 아프고 힘든데 다리가 그냥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니까 마지못해 발이 땅에 내딛는 것처럼 움직였다. 보도블록 색깔이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만 알아챌 정도였다. 내가 죽었나.. 살았나... 아무런 생각도 안 나고 '움직여야 해. 멈추면 안 돼.' 하는 말들만 되뇌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다리도 마음대로 안되고 발은 이미 피가 묻어 나오는 것 같고. 완주지점은 저 멀리 보이는 것 같은데 가까워지는 것 같지는 않고. 주저앉고 싶어 져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발만 보며 걸었다. 손목에 묶어놓은 야광팔찌의 무게가 느껴질 만큼 지쳤는데도 정말 한 걸음, 한 걸음.


정말 천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어요~' 축제스탭 한 분께서 목에 메달을 걸어주시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해냈구나.' 하는 생각에 성취감과 함께 기쁨이 몰려오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손도 다리도 너무 떨려서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해냈다는 이 벅차오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와...끝났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2시 반이었고, 가방도 멘 채로 바닥에 엎드려 잤던 것 같다. 일어났을 땐 다리가 구부려지지도, 펴지지도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근육통이었지만 어제 일어났던 일이 진짜라는 증거가 되는 것 같아서, 근육통이 사라지는 4일 동안 계속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마 어떤 출발을 하든 비슷할 것이다. 처음엔 쉽게, 점점 힘들어지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고 나서야 도달하는 것. 지칠 때 한 걸음씩 계속 걸어서 해낸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보통 우리가 성취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으니까. 해낸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이미 해냈다. 그저 잊어버렸거나 몰랐을 뿐이다.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타인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내가 이루어낸 무언가를 떠올리고, 제 때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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