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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Oct 18. 2024

Chapter 2. 열 걸음 뒤의 소녀

가장 행복했던 순간

    수연은 자신의 이름이 좋았다. 정수연. 자신을 잘 표현해 주는 이름 같았다. 정의로운. 그런 수연.


    이런 성격 때문에 학창 시절 수연은 고생을 사서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굳이 왕따를 당하는 아이의 편을 들어 소위 노는 애들의 눈초리를 받거나, 남자애들끼리 주먹다짐하며 싸우는걸 온몸을 던져 말리곤 했다. 선생님들과 부모님은 수연이 너무 착한 탓이라며 애정어린 한숨을 폭폭 쉬었지만, 수연은 선의나 동정 같은 감정으로 그 아이들을 도운 게 아니었다. 수연이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분노와 증오에 가까웠다.


    인간의 퍼포먼스는 모두 다르지만 인간 존재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다. 동일하게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동일하게 가치 없다면 가치 없는 게 인간의 존재이다. 그런 인간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어 이 작은 지구에서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한 역사가 수억 년인데, 인간은 아직도 자신이 타인에 비해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순간 다른 인간보다 가치 있는 척 상대방을 짓누른다. 덩치가 더 큰 남자아이, 욕을 더 잘하는 여자아이, 돈이 더 많은 아줌마, 오래 살면서 남들보다 지혜로워졌다고 믿는 아저씨. 그 사람들의 부당한 지배욕구를 보고 있자면 수연의 주먹은 부들부들 떨렸다.


    한 명의 피해자가 생기고, 그 과정이 하나의 성공 사례로 남게 된다면 그다음 피해자가 생기는 일은 훨씬 쉬울 것이다. 적어도 모두가 서로를 지켜보고 있는 이 교실, 사무실, 버스, 지하철, 길거리에서는 그렇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가해자를 제재하기 위해 수연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했다.


    가을 햇빛이 투명하게 비추던 교실의 쉬는 시간이었다. 수연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기념으로 부모님한테서 선물 받은 펜을 딸깍거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을 사랑하는 수연에게 나뭇잎들이 푸른빛을 잃고 붉은색을 띠기 시작하는 모습은 언제나 조금 시원섭섭했다. 사색에 잠겨 계절의 변화를 느끼던 중, 교실 뒤쪽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 아, 아아 안,, 안… 안냐..냥.. 안녕…”


    듣는 수연마저 힘겹다고 느껴질 정도로 안녕이란 단어 하나에 혼신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아이였다. 어깨를 스치는 단발머리가 며칠을 안 씻은 건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떡진 뭉텅이로 어깨에 얹어져 있었다. 두꺼운 안경알이 커다랗게 확대해 놓은 동공과 입안에 배열 없이 벌어져 있는 치아들. 깡마른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상처 가득한 붉은 피부. 뭐 하나 온전한 게 없는 아이였다.


    학기 초라 그랬을까, 수연은 이 아이의 존재를 처음 마주한 듯했다. 이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고민하며 귀를 기울이던 중 그 아이는 겨우 한마디를 더 보탰다.


    “반,,반..가..반가..워.. 나는.. 진..진영…진영이..야.”


    아, 진영이. 이진영이었지. 진영이가 힘겹게 말을 건넨 상대는 다름 아닌 선형이었다. 선형은 진영이가 건넨 인사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 두 팔을 꽉 쥐어 몸을 부르르 떨쳐내며 소리쳤다.


    “말 걸지 마! 벌레 같은 게!”


    선형은 종종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학생들에게 웃음으로 무장된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였다. 쉽게 그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복도를 꽉 채우는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빽빽 불러댔다. 그들을 일방적으로 친구라 부르며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물건들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그들의 소지품을 무기한으로 빌려 갔다. 아이들은 얼마 남지도 않은 자신의 자존감을 내어주며 선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선형의 만행을 보고 있자면 수연은 당장이라도 그 앞을 가로막고 싶었지만, 막상 당하는 아이들은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선형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하지만 약한 자는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찾아 힘을 행사하듯, 선형에게 괴롭힘당한 아이들은 그대로 진영에게 다가가 진영을 비웃었다. 진영이는 마치 투명 인간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진영이의 실존하는 모든 흔적과 증거를 외면하며 생활했고, 그중 참을성이 부족한 몇몇 아이들은 새어 나오는 증오스러운 말들을 참지 못하고 진영이의 면전에 대고 내뱉었다.


    진영이는 방금 선형이 자신을 벌레 취급한 걸 알기나 하는지, 손바닥을 펼쳐서 손가락을 제각각 흔들었다.


    “반..반가..워.. 나는… 이..진..영이…이야..”


    그 순간이었다. 수연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툭 내려놓았다. 큰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나 교실 뒤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수연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구역질하는 듯한 제스쳐로 호응을 이끌어내고있던 선형을 몸으로 밀친 후 진영의 앞에 똑바로 섰다.


    “안녕. 나는 수연이야. 정수연.”


    진영의 커다란 눈이 커다란 안경을 통해 더 커졌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본 듯, 진영의 눈은 수연에게 꽂혔다.


    씨익 웃는 진영의 치아에는 알록달록 여러 색의 이물질이 가득 끼어있었다.


-


    그 후로 수연은 종종 진영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라고 해봤자 진영의 힘겨운 인사 한마디를 가만히 기다려준 후, 인사를 받아주는 것, 그뿐이었다. 그렇게 수연이 씨익 웃으며 진영에게 도로 인사를 건네줄 때면 진영의 눈은 신기한 광경을 본 듯 커졌다. 진영은 꾸밈없는 순수한 행복을 담아 커다란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수연에게 종종 부담스러울 때도, 종종 따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수연은 진영을 일부러 빼고 만든 단톡방에서 반장이 공지 사항을 알려주면 진영에게 그 내용을 전달해 줬고, 진영의 서툰 인사가 놀림 받을 때면 그 앞을 막아서고 진영을 꺼내어주었다. 수연에게는 큰 힘이 들지도, 큰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은, 그냥 사소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늘 혼자 급식을 먹는 진영이 안타까워 점심도 함께 먹자고 하려 했으나, 수연의 친구들은 손사래 치며 수연을 말렸다. 수연이 외로운 진영이의 점심시간에 보태줄 수 있는 것은 밥을 다 먹고 난 뒤 남은 십 분의 점심시간을 진영과 함께해주는 것뿐이었다. 수연이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소화할 겸 운동장을 한 바퀴 걷다 보면 학교 정문 앞 바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진영이 있었다. 그런 진영을 보면 수연은 함께 걷던 친구들에게 눈짓으로 진영에게 가겠다고 시그널을 보낸 채 조용히 무리를 이탈했다.


    수연이 조용히 진영이가 쪼그려 기대고 있는 바위 근처의 벤치에 앉을 때면, 진영은 허우적대며 일어나 뒤뚱뒤뚱 엉성한 걸음으로 벤치 옆으로 다가왔다.


    ”안…안녕? 나.. 여기에 앉아도..도..돼?“


    매일 반복되는 레퍼토리였지만 진영은 매번 상당한 긴장감을 안고 수연에게 물었다. 수연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면 진영은 설레는 듯 작게 폴짝 뛰고 수연의 옆에 앉았다.


    대화라고 하기엔 부족한 소통을 하다 보면 진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진영은 어릴 적에 열이 크게 났었는데, 그 이후 말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 진영에게는 수연과 같은 이름을 가진 여동생이 있다는 것. 진영은 주섬주섬 수십 년 전에 출시된 것 같은 폴더폰을 꺼내어 열며 자신의 동생 사진을 내밀었다. 수연은 그 사진을 보며 멀쩡한 진영 동생의 모습에 놀란 자신이 싫었다. 정상적이고 멀쩡한 여느 또래 여자아이 같은 진영의 동생을 보며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예…예쁘..지? 내 동..생.. 이수영…"


    진영이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침을 튀기며 말했다. 수연은 진영이 너도 예쁘다고 말하려다 커다란 슬픔에 잠겨 그저 끄덕이고 말았다.


    평소와 똑같이 평화롭던 점심시간, 진영이 엉거주춤 수연의 벤치 앞으로 와 허락을 묻고 앉았을 때 선형이 비릿한 미소를 품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선형은 진영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수연의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서 말을 건넸다.


    "수연아. 너 진짜 비위 좋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밥 먹자마자 매번 그렇게 이진영이랑 같이 앉아 있니?"


    과하게 직설적인 비난에 적잖이 놀랐지만, 수연은 냉랭한 눈빛으로 선형을 올려다봤다.


    "아니, 그리고, 너무 웃기잖아. 무슨 신분 상승이라도 한 마냥 땅바닥에 앉아 있던 애가 너만 오면 사람 앉는 벤치로 올라와서 사람인 척을 해."


    수연이 주먹을 꽉 쥐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치고자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는 순간 선형은 수연의 깊은 내면의 죄책감을 찌르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와줘야 이진영도 잠시나마 인간 행세하는 건데, 고작 점심시간에 십 분만 같이 있어 주는 거야? 착한 척을 할 거면 똑바로 해 정수연.”


    그 순간 선형에게 소리 지르며 몸을 던진 건 다름 아닌 진영이었다. 진영은 어눌한 말투로 자기 친구 수연을 괴롭히지 말라며 소리쳤다. 진영과 살이 닿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충격이었던 선형은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손을 휘저었다.


    수연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 터벅터벅 비명을 지르는 선형과 뒤엉켜있는 진영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마디마디 접은 주먹으로 선형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수연의 폭력에 벙찐 선형은 비명을 멈추고 충격에 휩싸인 눈동자로 수연을 올려다봤다. 그 눈빛에 수연의 죄책감은 폭발해 버렸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선형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최대한의 해를 가하려 노력했다. 정신없이 셋이 뒤엉켜 싸우는 중에 수연은 보았다. 진영이의 순수한 즐거운 미소를. 무슨 의미의 미소였는지는 모르지만 수연 또한 웃음이 픽 난 것을 숨기며 선형의 살을 할퀴고 머리칼을 뜯었다.


    경비아저씨와 선생들이 소리치며 달려와 셋을 떼어놓고 선형은 바로 양호실로 들려갔다. 그 후 선형이 머리를 서너 바늘을 꿰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싸움의 원인에 떳떳하지 못했던 선형은 일을 키우지 않고 넘어갔다. 원래 반 아이들을 돌아가며 잔잔하게 괴롭혔던 선형이었기에, 이 싸움에 대한 이야기들은 금방 퍼졌고, 수연은 학교의 영웅이 되었다. 선을 위해 악을 물리친 히어로, 약자를 보호하며 힘을 쓴 강자. 많은 아이들의 존경과 응원을 받는 입장이 된 수연은 잠시나마 정말 멋진 사람이 된 듯 자랑스러웠지만, 그 사이 진영은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약자로 굳어져 갔다.


    한참 동안 수군거림의 중심이었던 셋의 소동도 몇 주 가지 못하고 수그러들었다. 점점 수연과 진영은 다시 잔잔한 관계를 유지했고, 오히려 그 사건 이후에 진영을 괴롭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색한 보여주기식 친절로 진영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분위기는 진영을 모두가 챙겨줘야 하는 방향으로 자리잡혔다. 수연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덜어내며 점심식사 후에도 다시 친구들과 수다 떨며 산책하다 반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 진영과 수연은 각자 다른 반에 배정받아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모든 게 잘못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동안의 작은 순간들이 가스가 새듯 주변 공기에 퍼져있다 불꽃 하나를 만난 것처럼 터졌다. 진영은 매일, 매 쉬는 시간마다 복도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전력 질주를 하며 수연의 반으로 찾아왔다. 복도에 있는 아이들과 부딪혀도, 미끄러져 넘어져도 진영은 맹목적인 목표 하나만을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렸다. 쉬는 시간에는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학생들과 그 자투리 시간에도 열성을 다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은 탓에 진영의 방문은 늘 환영받지 못했다. 교실 문을 벌컥 열고 수연의 자리 앞까지 찾아와 끈적이게 웃는 진영에게 수연은 여러 번 타일렀다. 더 이상 같은 반이 아니니, 이렇게 자주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도 어김없이 진영은 매 쉬는 시간마다 수연을 찾아 달려왔지만 반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교실 뒷문에 작게 달린 창문에 파리가 붙어있듯 두 손을 활짝 펴고 딱 붙인 후 10분 동안 수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돌아갔다. 매 교시, 매 쉬는 시간, 매일. 반 아이들은 이 광경이 너무나도 공포스럽다며 수연에게 조치를 취할것을  요구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진영은 불이 꺼진 깜깜한 복도에서 수연을 기다렸다. 수연이 교실 밖을 나오면 졸졸 뒤쫓아와 열 걸음 뒤에서 수연의 귀갓길을 따라가 곤했다.


    수연의 친구들은 무시무시한 말들로 수연에게 경고를 해댔다. 진영이의 눈빛을 보니 미친 게 분명하다며, 처음으로 자신에게 잘해준 인간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이 너무 커져 더 미쳐버린 게 분명하다며 침을 튀기며 말했다. 걱정스러운 말투로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여러 대책을 논의했다. 수연은 그럴 리 없다며 무심한 듯 고개를 휘저어도 몸에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사건은 꼭 커다란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수연은 자신이 진영을 죽게 한 날을 기억한다. 별다른 일 없는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다를 게 있다면 그날은 유독 날카롭게 찌르는 생리통에 수연의 신경이 조금 더 예민했던 정도. 배를 부여잡고 천천히 석식을 먹고 난 뒤 친구들과 운동장을 돌며 산책했고, 평소처럼 친구들은 진영의 치아에 끼어있는 이물질을 비난했고, 공포영화를 봤다면서 그 살인마가 진영의 눈빛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에 시간을 다 쏟아부었지만 결국 풀이를 보며 한탄했고, 그 수학 문제 때문에 하지 못한 다른 일들을 처리한 후 불이 다 꺼진 교실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을 뿐이다.


    평소처럼 진영은 자신의 뒤를 쫓아 걸어오고 있었다. 길고양이, 아니, 바퀴벌레처럼. 수연이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함께 내리자마자 뒤돌아 진영을 쳐다봤다.


    “따라오지 마.”


    진영의 대꾸를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생각보다 더 차갑게 내던진 말을 뒤로하고 수연은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수연의 발걸음 뒤에선 급히 쫓아오는 진영의 발걸음이 들렸다.


    그 순간 기억난 게 왜 하필 친구가 알려준 공포영화의 명대사였는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죽이겠다는 살인마의 대사가 떠올랐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도 있고, 아직 나는 교복을 벗지도 못했다. 수연은 그대로 내달렸다. 무릎과 땅이 닿는 느낌으로 스프링처럼 달려서 도망쳤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서 집에 들어온 후 수연은 현관에 기대어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안부를 묻는 엄마에게 헐떡이는 숨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빠르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켰다. 친구가 봤다던 공포영화를 틀었다. 다시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그날 이후로 진영은 수연을 찾아오지 않았다. 매일 하루에도 대여섯 번은 훌쩍 넘게 찾아오던 진영이 사라지니 수연은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이렇게 쉬운걸, 그동안 왜 괜히 스트레스받았는지. 수연은 공부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인생을 결정짓는 수능시험이 채 석 달이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진영이 사라진 이제서야 교실의 냉기 가득한 창살에 비추는 햇살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서야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천천히 걸어가는 매점이 즐거웠다.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평화롭다고 인지하는 순간 꼭 그 평화는 깨지고 만다. 수연은 자신을 가르치는 과목이 하나도 없는 다른 국어 선생님의 부름에 교무실을 걸어가는 그 순간이 자신의 평화를 가져가 버릴 순간임을 직감했다.


    수연이 교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수연이 내딛는 걸음마다 앉아 있는 선생님들이 모두 수연을 손짓으로 안내해 주었다. 마치 인간 표지판들이 발을 내딛는 곳마다 깔려있는 듯했다. 수연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 자신을 불러낸 선생님 앞에 서게 되었다. 선생님은 경찰복을 입은 마르고 흰 남자와 함께 있었다.


    “어떻게.. 자리를 좀 옮길까요?”


    선생은 경찰을 향해 어두운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네, 빈 교실이나 닫힌 공간으로 안내 부탁 드립니다.”


    경찰은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두 사람을 따라 천천히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3층의 상담실로 걸어가던 수연은 매번 열 걸음 뒤에서 걸어오던 진영이 문득 떠올랐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 세상이 내 존재를 까먹은 기분. 주먹을 낮게 쥐고 펴며 진영의 커다란 눈동자를 떨쳐냈다. 상담실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은 경찰은 핏기가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고 이야기를 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수연의 생각들은 경찰의 말에 금방 뾰족하게 깨져버렸다.


    “이진영 양의 유서에서 수연 양의 이름이 언급되었어요.”


    어느 부분에서 놀라야할지, 슬퍼야할지 모르겠다. 그 순간 수연에게 닿은 가장 첫 감정이 다름 아닌 후회인 게 가장 징그럽게 싫었다. 그날, 교실 뒤쪽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진영을 보지 말걸. 그날, 진영에게 인사를 건네지 말걸. 진영의 눈에 희망을 심어주지 말걸.


    경찰은 말없이 앉아 있는 수연을 진정시키려는 듯 설명해 주었다. 진영은 어젯밤 9시경 방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유서로 추정되는 종이에는 수연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며, 수연과 인사를 할 때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수연을 만날 시간만을 기다리며 모든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 외에 부정적인 이야기는 일절 없는 이 단순하고 행복한 글이 진영의 유서였다. 경찰은 범죄나 따돌림을 연상케 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기에 수연이 어떠한 용의선상에 오른 건 전혀 아니며, 그저 진영의 사건이 단순 자살로 종결해도 될 사건인지 알아보기 위해 수연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의 첫 질문에 수연은 오랫동안 참고 문드러졌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정수연 양은 이진영 양과 어떤 관계였나요?”


    그날 이후론 천천히 진영의 생각이 사라졌다. 아무리 커다란 충격이어도 인간은 몇 주, 길어야 몇 달이면 그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사라지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한다. 문득문득 사진처럼 떠오르는 진영의 얼굴과 어눌한 목소리에 주저앉던 일상은 한 달을 채 못 갔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내던 수연의 머릿속에 오랜만에 진영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진영이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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