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빛
수연은 여자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두 번째 연락을 기다렸다. 그날 이후로 열흘이 지났지만, 수연은 한 달이 지나도, 혹은 일 년이 훌쩍 넘게 지나도 그 여자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여느 날과 똑같이 리셉션에서 멍하니 로봇들을 지켜보던 중 동기들의 속닥거림 속 한 단어가 수연의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다. 해킹. 분명히 해킹이라고 했다. 인터랙트처럼 민감한 아이들의 생체 정보와 개인정보들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회사에서 해킹이라는 단어는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인터랙트 본사는 수십억을 퍼부어 자신들의 대단한 보안시스템에 대해 광고하였고, 이런 인터랙트 시스템을 뚫는다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수연은 주변에 듣는 사람들이 있는지 한번 휙 돌아본 후 슬그머니 대화에 참여하고자 동기들이 모여있는 리셉션 뒤 휴게공간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도 그 해커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인터랙트 리셉션 팀의 청일점, 영우가 물었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우리 모두 징계야.”
나뭇가지처럼 빼빼 마른 동기가 날카롭게 인상을 찌푸리며 영우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영우는 놀란 듯 입을 한번 커다랗게 벌렸다가 꾹 닫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 다른 동기는 영우를 살짝 밀어내고 동그랗게 서 있는 동기들의 중앙으로 들어오며 속삭였다.
“LA8CH. 이번에도 그 아이디야.”
시스템 개발팀에서 근무 중인 동기가 마치 대단한 정보를 말하는 듯이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가십거리들의 맨 뒤에 서 있는 수연에겐 낯선 아이디였지만, 동기들은 그 아이디를 듣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술렁였다. 어떤 이들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매섭게 쓸어내리며 옆 사람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수연은 모두가 놀란 틈을 타 그들을 모두 훑어보며 물었다.
“LA8CH? 그 아이디가 누구 건데?”
이번에는 영우가 다시 개발팀 동기의 어깨를 뒤로 밀어내며 어디서 가져온 지 모르겠는 간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수연, 너 때문에 리셉션 팀의 위상이 떨어진다 정말. 우리 위 기수고 아래 기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LA8CH는 이미 올해만 해도 스무 번은 넘게 인터랙트 시스템을 뚫은 전설적인 해커라고.”
그 옆에서 눈알을 굴리며 요리조리 망을 보던 빼빼 마른 동기가 덧붙였다.
“그냥 일반 해커의 수준이 아니라, 사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인터랙트 본사의 모든 시스템을 손가락 한 개로 다운시킬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해.”
언제 대화에 합류했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레 자리를 잡은 또 다른 동기도 슬쩍 한마디를 보탰다.
“근데 더 놀라운 건, 이 일에 대해서 인터랙트 본사는 쉬쉬한다는 거야. 이미 본사에서는 그 해커의 신상을 모두 알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
그 말에 모두 동시에 웅성거리며 각자 자신들만의 이유를 유추하는 말들을 내뱉었다. 소란스러운 낌새를 눈치채고 휴게공간에 들어온 정현 선배는 삼삼오오 모여있는 후배들을 향해 인상을 쓰며 간결히 말했다.
“놀러 왔어? 똑바로 일 안 해?”
정현 선배는 큰 키로 휴게실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 양팔을 꼬은 뒤 모여있는 동기들의 얼굴을 한명 한명 살펴보았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얼어붙은 동기들은 모두 한마디씩 사과를 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특히나 정현 선배와 같은 시스템 개발팀이었던 동기는 자신이 말하면 안 되는 내용을 말했다는 사실을 들킨 게 상당히 신경 쓰였는지 몇 번을 우물쭈물대다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정현 선배는 당황하며 사라지는 동기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갑자기 픽 웃었다. 수연은 그 웃음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마치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자리를 피하지 않고 휴게실의 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수연은 나지막이 물었다.
“사실인가요?”
정현 선배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수연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그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수연의 존재에 다소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뭐가?”
수연은 정현 선배의 의미 없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 물었다.
“인터랙트 본사에서는 이미 LA8CH의 신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다는 거요.”
수연은 머릿속으로 교육받은 응대 매뉴얼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 당황하지 말기를 되뇌며 정현 선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잠시 눈을 반짝이며 작게 입을 벌렸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경 끄는 게 좋을 거야. 가서 네 일이나 봐.”
수연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게 될까, 걱정되는 듯이 서둘러 정현은 자리를 피했다. 수연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작전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열흘 전 자신에게 전화했던 그 여자를 도울 방법들을. 수연의 심장이 콩닥거리는 게 귀 뒤의 맥박으로 느껴졌다.
-
해커에 대한 작은 소동이 있고 나서 한동안 인터랙트 본사는 다시 잠잠해졌다. 수연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걸려 오는 전화로 고객들의 항의나 문의에 응대해 주었지만, 여전히 미궁의 외국인 여자는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연은 편하게 앉아 있기엔 조금 높은 스툴에 기대어 턱을 괴고 멍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이렇게 외롭고 애타는 것인가에 대한 혼자만의 생각들을 펼쳐놓던 중, 인사팀에 소속된 무영이 수연을 찾아와 잠깐 이야기하자는 눈짓을 보냈다. 무영은 수연과 같은 기수의 동기이지만 워낙 입사 초부터 인사팀에 가고 싶다는 자신의 열정을 강하게 표출했기에, 동기들은 그를 조금은 멀리하고 어려워했다. 동기들끼리 모여서 각종 불만과 스트레스들을 늘어놓다가도 무영이 근처에 오면 모두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무영을 뒤따라 들어온 작은 복도에는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둥근 커피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있었다. 누가 봐도 그 자리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고 만들어둔 공간이었지만, 회사의 의도가 너무 명확하게 느껴져 오히려 그 본질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 자리는 사방으로 뚫려있는 복도의 한가운데에 있었기에, 그 공간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회사가 허용해 둔 범위의 대화들만이었다. 그런 탓에 수연과 동기들은 그 멋진 인테리어의 일부인 소파 공간 대신, 비상구 계단이나 허름한 탕비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무영은 달랐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비닐을 한 꺼풀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갈하게 나눠진 가르마와 각 잡힌 셔츠 그리고 그의 피부톤에 비해 살짝 밝은 듯한 얇은 피부 화장까지 왜인지 모르게 너무 강렬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수연씨, 이번에 우리 연말 파티하는거 알죠? 12월 28일.”
무영은 마치 자신이 회사와 한 몸이 된 듯 인터랙트를 우리라고 칭했다. 수연은 그의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살짝 긴장이 풀렸다. 수연은 잘못한 일이 없지만 왜인지 모르게 무영의 눈동자 속 가득 찬 우월감이 보일 때면 무영이 인사팀을 대표하여 자신을 향한 징계를 내리러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 얼마 전에 이메일로 초청장 받았어요. 드레스코드가 블랙 앤 골드라고 그랬었죠?”
아마도 무영이 직접 만들어 보냈을 초청장을 수연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흡족한 듯 무영은 살짝 자세를 바꾸며 웃음을 지었다.
“어때요? 너무 유치한가 하고 고민했는데….”
무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 수연은 천천히 부드럽게 말했다.
“원래 파티는 조금 유치해야 재밌죠. 기대되는데요?”
수연의 너스레에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무영은 큰 소리로 하하 웃었다. 마치 40대 중후반의 성공한 사업가가 낼 만한 웃음소리였기에, 수연은 속으로 무영을 조금 비웃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네요. 사실 수연씨한테 행사 진행 엠씨를 부탁하고 싶어서 왔어요. 물론 대본은 우리가 따로 준비할 거고, 소정의 보너스도 감사의 표시로 지급할 거예요.”
무영은 어색하리만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이어 그는 얼어붙은 수연의 표정을 살피며 한 번 더 수연에게 말했다.
“아니, 우리 팀에서도 서로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가 보기엔 워낙 우리 수연씨가 인포메이션 데스크의 얼굴이니까 수연씨로 강하게 밀어붙였죠. 어때요? 해줄 거죠?”
수연은 이미 머릿속에 예의 바르게 거절할 방법들을 찾고 있었다. 특히나 무영같이 전혀 상대방의 니즈를 파악 못 하는 사람의 부탁은 수연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순간에 도대체 무영은 무슨 생각으로 수연의 외모를 칭찬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 믿고 그 수를 던진 걸까. 수연은 적당히 눈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좀 있어서요. 좋은 자리이지만 조금은 부담스럽네요.”
무영은 한 번 더 소리 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약점을 극복해 봅시다! 수연씨 선배인 정현 씨도 흔쾌히 엠씨 맡아서 해준다 했는데, 수연씨가 이러면 나 정말 서운해요.”
이미 수연을 엠씨자리에 앉히려고 굳게 마음먹고 온 무영을 뿌리치는 대신 수연의 신경은 정현 선배에게 꽂혔다. 정현 선배는 절대 그런 자리에 쉽게 승낙할 사람이 아니었다. 수연이 대학생 시절에 간 인터랙트 인턴 모집 설명회에서 정현 선배는 이미 수려한 외모와 큰 키로 많은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인터랙트 보석이라는 별명으로 소셜 게시판에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한 인플루언서 급의 인지도를 가진 선배였다. 그는 설명회 당시에도 따분하다는 표정과 무관심한 태도로 억지로 이곳에 끌려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설명회에서 자신에게 사적인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여학생을 울게 만들어 인사팀 담당자가 한참을 곤란해하기도 했었다. 막상 수연이 인터랙트에 입사하고 난 뒤 본 정현 선배는 냉정함을 넘어선 무례함이 가득했고, 그의 무관심한 태도들은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에서 시작됐음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팬심을 갖고 정현 선배를 선망하는 여러 동기와 달리 수연은 그를 멀리했고, 종종 그에게 적대감을 표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선배가 LA8CH 아이디의 해커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그와 접점을 갖게 된다면 수연도 조금 더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정현 선배가 엠씨를 승낙했다는 것은 일종의 하늘이 준 기회였다. 수연은 잠깐의 정적을 갖고 무영에게 말했다.
“그럼, 저도 할게요. 정현 선배가 한다고 하니 저도 해야죠.”
이미 정현을 향한 수많은 여직원의 선망을 알고 있던 무영은 허탈하게 웃으며 수연을 장난스럽게 노려봤다.
“아, 수연씨도 결국 미남을 택했군요. 조금은 실망이에요.”
수연은 수줍은 척 고개를 숙이고 살짝 웃었다. 무영이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 속에서 잘못된 추측을 내리는 것을 보며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수연은 정현 선배와 단 둘이 대본 연습을 두 번 진행했다. 정현 선배는 약속된 연습 시간 오 분 전에 여러 번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했고, 참석한 두 번마저도 이십 분도 안 있다가 컨디션이 안 좋다며 나가버렸다. 그는 늘 따분한 표정으로 들어와 한참을 휴대전화만 보다가 도둑처럼 휙 사라지곤 했다. 수연은 그가 처음부터 왜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차분히 혼자 자신의 분량을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행사 전 마지막 연습이 잡혀있는 날이었다. 오늘만큼은 정현 선배와 주고받는 멘트를 꼭 연습해야 했기에, 수연은 수차례 정현 선배에게 이번 연습은 올 수 있는 거냐고 물었다. 정현은 마지못해 이번에는 끝까지 연습을 같이 이어 나가겠다고 답했다. 이 마지막 연습을 위해 수연과 정현은 퇴근 후 각자 간단한 저녁을 먹고 무영이 대신 잡아둔 회의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정현을 기다리며 수연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 평소 회사에서와는 다른 옷차림으로 설렁설렁 정현이 들어왔다. 그는 회색 추리닝바지에 큰 모자가 달린 편안한 후드티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걸어들어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수연은 회의실의 맨 끝자리에 홀로 널브러져 앉아 있는 정현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정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에서 자신의 개인 노트북을 꺼내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오 분이 지나고 정현은 이제서야 수연의 살기 어린 차가운 눈빛이 느껴졌는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 밥 먹고 편한 옷 좀 갈아입고 오느라.”
수연은 그의 무성의한 변명을 무시한 채 물었다.
“애초에 왜 하겠다고 한 거예요?”
수연의 질문에 허를 찔린 듯 정현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해달라니까 한다고 했지. 그럼 너는?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수연은 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자신의 대본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수연의 냉담하고 빈틈없이 단단한 적대감에 조금은 눌린 듯 정현도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두곤 꾸깃꾸깃한 대본을 펼쳤다. 그렇게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둘은 각자의 대본만을 의무적으로 읽어가며 합을 맞추었다. 그러던 중 정현은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 정현은 수연이 신경 쓰이는 듯 수연의 눈치를 보며 급한 전화라 잠깐만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홀로 물을 마시던 수연은 정현의 노트북에서 울린 알림음에 깜짝 놀라 옷에 물을 조금 흘리고 말았다. 짜증이 잔뜩 나서 손으로 옷을 툭툭 털던 수연은 어쩌다 시선의 모서리에서 반짝거리는 정현의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정현의 노트북 화면에는 이상하리만큼 비어 있는 메일 수신함이 보였는데, 이메일이 딱 한 개만 와있었다. 메일함을 의도적으로 비우지 않는 이상, 메일이 하나만 와있다는 사실은 수상해 보였다. 수연은 주변을 살핀 뒤 의자의 바퀴를 끌어 정현 선배의 노트북 쪽으로 다가갔다. 몇 초 전 도착한 그 이메일의 제목은 ”가족과 함께할 최고의 휴양지, 이탈리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고 쓰여있었다. 광고성 스팸메일이라 여기고 시선을 돌리려던 차에 본문의 일부가 수연의 눈을 사로잡았다.
LA8CH (최광)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더 보기)
미리보기에 허용된 한 줄의 본문은 수연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LA8CH. 그 해커의 아이디다. 최광이라는 단어는 그 사람의 이름일까? 그 옆의 정보는 그의 위치를 알려주는 주소일까? 철커덕 문을 열고 들어온 정현 선배의 인기척에 수연은 황급히 노트북 화면에서 멀어진 채로 어색하게 기침했다.
정현 선배는 그런 수연의 수상한 움직임에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대본을 집어 들었다. 다만 대본을 다시 읽기 시작하기 전, 정현은 자신의 노트북에 꽂힌 새로운 이메일을 보자마자 수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데요? 우리 아직 반이나 남았잖아요! 갑자기 나가면 어떡하라는 거예요 선배?”
수연은 정현에게 쏘아붙였지만, 사실 수연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이 행사 엠씨일은 중요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저 그 핑계로 정현에게서 해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정현은 평소와 다른 친절한 말투로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수연에게서 벗어났다. 수연은 가방을 다 잠그지도 않고 뛰쳐나가는 정현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
연말 파티 당일의 행사장은 온통 번쩍거리는 금색의 휘황찬란한 모습이었다. 전 직원 모두 퇴근을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빨리한 후 도보로 오 분 정도 거리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기대감에 들뜬 직원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로 울리는 연회장은 생기로 가득했다. 높은 천정에는 여덟 개의 큼지막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무대의 하단은 전부 금색 장미로 덮여있었다. 무대 위를 비추는 카메라는 연회장 곳곳에 설치된 대형 디스플레이로 송출되고 있었는데, 마치 콘서트장에 온 듯한 구조였다. 장미꽃이 새겨진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은 웨이터들은 제각각 쟁반에 케이터링과 샴페인들 올려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다섯 명으로 구성된 연주가들이 굉장히 몰입한 채로 재즈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상당히 호화롭고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인터랙트 본사의 직원들은 안부를 나누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다.
곳곳에는 행사 기사를 내보내기 위해 인터랙트에서 섭외한 기자들과 방송사들이 돌아다니며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역시 대중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들을 충분히 보일 줄 아는 대기업의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무영은 본격적인 행사 진행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수연과 정현을 무대 뒤 백스테이지 공간으로 불렀다. 마지막 의상 점검과 격려의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정현 선배는 평소보다 더 멋진 외모를 뽐냈다. 그의 살짝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은 별도의 손질 없이도 한올 한올 완벽하게 늘어져 있었고, 깊은 자줏빛을 띠는 실크 셔츠는 그의 각진 어깨선을 따라 떨어졌다. 수연은 멍하니 그의 헤이즐 색 눈을 바라보다 머쓱하게 자신의 단발머리를 쓸어 넘겼다. 수연은 단정한 검정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얇은 골드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수연의 모습을 본 동기들은 모두 탄성을 내뱉으며 오버스러운 칭찬을 했다. 수연은 살짝 빨개진 귀를 머리칼로 숨기며 손사래 치며 웃었다. 백스테이지에서 수연과 정현이 마지막으로 중요한 부분에 대한 합을 맞추고 있었을 때였다. 무영이 급히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팀의 한무영입니다!”
대표님이라는 말에 수연은 깜짝 놀라 위를 쳐다보았다. 대표는 이런 호들갑이 부담스럽다는 듯 무영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오늘 행사를 진행해 줄 인터랙트 본사의 직원들이 여기에 있다고 해서 인사 차원에서 왔어요. 멋진 진행 부탁할게요.”
대표는 따뜻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풀어지는 웃음에 다들 매료된 듯 따라 웃었다. 대표는 차분한 남색의 셔츠와 어두운 회색의 정장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손목에는 굵은 금색 시계와 여러 겹의 금색 팔찌들이 차여있었다. 자연스러운 듯 보이는 그의 헤어스타일도 분명 오랜 시간의 스타일링 결과였음을 수연은 알 수 있었다. 수연이 본 대표의 모습은 따뜻하기도, 무서울 정도로 완벽히 계산되기도 해 보였다. 대표는 수연과 악수를 한 뒤, 정현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정현은 굳은 표정으로 대표를 잠깐 응시하다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대표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대표는 인사를 나눈 뒤 비서와 함께 다시 행사장 앞쪽으로 이동했고, 정현은 잠시 화장실을 가야 한다며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수연은 경직된 몸을 이끌고 성큼성큼 멀어지는 정현 선배를 보며 그가 자신의 움직임을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어딘가에 홀려있다는 걸 느꼈다. 그를 따라가야 할지 고민하며 무영의 조잘거리는 말들에 대꾸해 주다 보니 어느새 정현 선배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나 이제 무대에 올라가 행사 진행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 왔는데도 정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무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자기 팀의 막내들을 불러 정현을 찾아오라고 급하게 소리쳤지만, 정현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무영은 처음 보는 뾰족한 눈빛으로 수연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이런 거까지 땜빵해줘야 해? 아니, 지가 선배면 다냐고. 못 배워먹은 새끼.”
다소 거친 언행을 내뱉은 뒤 수연과 무영은 무대 위로 올라가 환한 미소로 행사를 시작했다. 정현 선배의 파트는 전부 무영이 맡아서 진행했고, 무영의 특기인 표정 관리와 재치를 살려서 행사 진행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수연 또한 무대공포증이라는 변명은 순 거짓말이었기에, 여유로운 태도와 표정으로 분위기를 훈훈하게 끌어나갔다. 수연은 이미 자신의 파트를 대부분 외웠기에, 어느 정도 기계적으로 진행 멘트를 뱉어댔다. 수연의 머릿속에서는 그저 정현 선배의 갑작스러운 실종만이 가득했다. 대표와의 짧은 인사 후, 무대로 올라가야 하는 시간 사이에는 고작 이십분도 안되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정현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수연은 안개가 자욱한 생각들 속에서 헤매던 중 정확히 무대의 중앙 객석에 앉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수연을 꿰뚫어 보는 듯한 대표의 눈빛은 이전에 보았던 따스한 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사냥감을 응시하듯 움직임 없이 그대로 앉아 수연에게 일종의 경고를 하는 듯이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연은 움찔거린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오버스럽게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렇게 수연과 무영은 각종 회사 영업이익 결과 발표나 팀별 매출 상황, 그리고 인사 개편 소식들을 발표한 뒤 모두가 기다리던 상품 추첨 시간을 앞두고 1막을 끝냈다. 한숨 돌리며 1막을 마무리하던 중, 수연은 연회장 뒷문으로 뛰쳐들어온 정현 선배를 보았다.
정현 선배는 멀리서 보아도 반쯤 넋이 나간 사람의 면모를 하고 있었다. 풀어헤친 셔츠의 단추들과 땀에 젖은 머리카락, 방황하는 몸짓을 보며 수연은 그가 만취한 사람 같다고 느꼈다. 정현 선배는 주변을 휘젓고 다니며 무언가를 외치다가 홀로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수연은 빠르게 마무리 멘트를 낸 후 무대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정현 선배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수연은 그가 나간 뒷문을 빠르게 통과해 호텔 로비 밖으로 나갔다. 수연은 바깥 호텔 주차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있는 정현 선배를 보았다.
정현 선배를 향해 다가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수연은 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선배, 괜찮아요?”
정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봤다. 그의 날렵한 얼굴에는 눈물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수연을 보자 긴장이 조금 풀린 듯 한숨을 내쉬었고, 곧이어 또 눈물이 한 방울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아이처럼 연약해 보이는 정현을 보며 수연은 물었다.
“최광. 그 사람에 대한 일이죠?”
정현은 수연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듯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정현은 곧이어 쉴 틈 없이 그날 그가 겪은 일을 토로했다.
“그래. 최광 그 사람을 난 오랜 시간 동안 추적했어. 내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에도 LA8CH라는 아이디는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었거든. 그 당시에 나랑 친했던 시스템 개발팀 선배는 LA8CH가 뚫은 보안코드의 이슈를 파보려고 수십 개의 코드 파일들을 분석하고 있었어. 그러다 우연히 LA8CH의 아이디로 커밋된 짧은 코드를 발견했지. 그 코드는 해킹에 사용된 코드는 아니었고, 일종의 노트였어. 인터랙트 시스템을 즉시 삭제하고 서비스를 영원히 중단하라는 짧은 메시지와 자신의 이름 두 자를 적어두었었지.”
수연은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 옅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이름이 최광이었군요.”
정현은 땅을 주시하며 살짝 끄덕였다.
“선배는 그 정보를 갖고 백 대표에게 협상하러 가겠다고 말했어.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토록 유능한 해커가 인터랙트 보안시스템을 뚫고 일종의 협박 메시지를 남겼다는 사실이 여론에 알려진다면 인터랙트 측에는 막대한 타격이 갈 테니까.”
충분히 그럴싸한 협상안이었다. 수연은 정현 선배의 떨리는 팔을 굳게 잡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달라는 눈빛을 전했다.
“500억. 그 선배가 요구한 돈은 500억이었어. 백 대표를 만나는 일 자체도 오래 걸렸지만, 온갖 방법을 이용해서 백 대표와 일대일로 만나게 되었지. 마치 내가 이번 행사 엠씨를 통해 백 대표를 만난 것처럼 말이야.”
수연은 그제서야 정현 선배가 흔쾌히 행사 엠씨를 수락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게 탄성을 내뱉자, 정현은 수연의 생각을 읽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선배가 백 대표에게 협박이 섞인 협상을 제안했는데, 백 대표의 반응이 어땠는줄 알아?”
수연은 잠시 고민했다. 백 대표가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던 그 눈빛을 다시금 떠올리자, 수연의 몸도 정현처럼 조금은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요. 화를 냈을 것 같아요. 그러고는 순순히 500억을 내어주었나요?”
정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통해 수연은 자신이 완전한 오답을 말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백 대표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대. 오히려 내 선배가 당장 물러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지. 선배는 그저 백 대표가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는 얘기만 반복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협박했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그만큼 나에게도 절대 들키기 싫은 비밀이었겠다고 추측만 할 수 있었지. 선배는 그날부로 회사를 그만두고 어딘가에 숨어 살기 시작했어.”
정현은 그 후로 자신이 직접 선배가 이루지 못한 협상을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500억이 아닌 800억을 요구하기 위해 최광이라는 이름 두 글자로 온갖 흥신소를 비롯한 업체들에 최광에 대한 정보를 의뢰했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드디어 그 최광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했다.
“난 아까 백 대표를 뒤쫓아가서 그동안 최광에 대해 알아낸 모든 것들을 말했어. 행사가 시작할 때까지 남은 20분 동안 800억을 송금하지 않으면 당장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할 거라고 협박했지. 이미 인터랙트 본사에서 부른 기자들뿐만 아니라 내가 초빙해서 불러둔 기자들도 여럿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야. 백 대표는 잠잠히 이야기를 듣다가 픽 웃었어. 냉소밖에 담겨있지 않은 웃음이었지.”
“백 대표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재밌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시계를 가리켰어. 되려 나에게 씩 웃으면서 17분 남았다고 그러더라. 알고 보니 백 대표는 이미 내 모든 작전을 알고 있는 듯했어. 그동안 내가 인터랙트 외형 시뮬레이터로 만들어낸 여러 가상 인물의 기록을 본사 시스템에 보유하고 있다고 협박하더라고. 행사가 시작하기 전까지 그 시스템 기록을 전부 삭제한다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날 협박했어.”
수연은 정현 선배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인터랙트 외형 시뮬레이터는 그저 아이의 외형적 특징들을 기반으로 성인이 되었을 시의 외형을 시뮬레이션하는 장치였기에, 그로 인해 만들어진 가상 인물들이 정현 선배의 약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 수연의 의문점을 알아챈 듯 정현은 한마디 보태었다.
“남자야. 내가 시뮬레이션해 둔 인물들은 모두 남자들이라고. 업무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개인적 욕구를 위해 만들어둔 외형들이었어.”
그제야 수연은 정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현은 누구에게도 그 시뮬레이션 기록을 들키면 안되었던 것이다.
“난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곧장 본사로 달려갔어. 800억보다 내 은밀하고 더러운 비밀을 들키는 게 더 무서웠거든. 어떻게 내달렸는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인터랙트 본사에 도착했어. 식은땀과 더운 땀을 줄줄 흘리면서 시뮬레이터 기록을 삭제했지. 근데 그때 내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가 삭제한 기록은 몇 초 후에 그대로 복구되더라. 이미 백 대표는 그 기록을 영원히 삭제할 수 없게끔 loop을 걸어둔 거야. 나는 미친 사람처럼 불 꺼진 사무실에 앉아서 기록을 삭제하고 또 삭제했어. 그렇게 몇십번을 반복하다 결국 백 대표에게 영원히 발목이 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이렇게 허무하게 말이야.”
정현 선배는 분노에 사로잡혀 다시 연회장으로 달려왔고, 막상 연회장에 도착하여 평온하게 앉아 있는 백 대표를 보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두려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몇 년 전 자신의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하며 터덜터덜 밖으로 나왔던 것이었다.
정현은 길었던 자신의 이야기가 다 끝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싸워냈던 이 결투를 수연 한 사람이라도 알아주길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신의 처참한 패배라도 누군가는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듯이. 수연은 상상도 못 한 정현의 이야기에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수연도 자신이 정현에게 접근한 목적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선배가 알아낸 사실들을 알려줘요. 당신의 선배가 시도했고, 그리고 당신이 시도했던 그 일을 이젠 내가 해볼게요. 나는 백 대표가 협박할만한 약점이 없어요. 잃을 게 없다는 것만큼 확실한 무기가 더 있을까요?”
정현은 수연의 당돌함에 말을 잃은 듯했다. 곧이어 그는 서러움이 섞인 분노로 수연에게 소리쳤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다 듣고도 그런 생각이 들어? 제정신이야? 안돼 정수연. 백 대표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너까지 평생을 두려워하며 숨어 살게 하고 싶진 않아!“
수연은 정현의 눈을 바라보며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500억. 500억 줄게요. 5대5로요.”
정현은 굳은 채로 한참을 가만히 생각했다. 역시 자신이 하려 했던 일을 타인이 그대로 하려고 한다면, 그 타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돈을 위해 이런 짓을 벌였던 사람이니, 타인 또한 그렇게 하고 싶을 거라 믿는 본능은 당연하니 말이다. 정현에게 수연은 그저 돈을 쫓는 어리석은 직원으로 비쳤을 것이다.
“5대5, 확실한 거야?”
망설임 없이 확실하다고 답한 수연을 보며 정현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수연의 이메일을 받아적었다.
-
그날 이후 정현 선배는 인터랙트에서 퇴사했다. 여러 여직원은 그의 퇴사 소식에,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로 인해 며칠이 지난 후 수연은 개인 이메일로 정현에게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메일 본문에는 수연이 약속한 1,000억에 대한 절반의 액수 500억이 쓰여있었고, 일종의 계약서 형태를 하고 있는 이메일이었다. 수연에게 해당 계약에 동의한다면 자신의 서명과 함께 회신하라고 적혀있었고, 수연은 고민 없이 회신했다. 그러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연에게는 최광의 주소지와 학벌 정보가 도착했다. 애초에 백 대표에게 협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그 계약은 성립될 수가 없었다. 1,000억을 받았을 때나 성립되는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은 매일 야근하며 외국인 여자의 전화만을 기다렸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최광을 찾아가 어떻게든 그의 협업을 끌어내 그 여자를 돕게 할 작정이었다. 물론, 방법은 오직 협박뿐이다. 수연이 알고 있는 정보라곤 외국인 여자가 이미 이름이 등록된 인터랙트에 기존 이름을 삭제시키고 새로운 이름을 등록하길 원한다는 것뿐이었기에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건 불가능했다. 남의 약점을 무기 삼아 원하는 것을 이뤄내야 한다니, 자신의 이익이 아닌 남을 돕는다는 취지 하나로 이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프론트 데스크의 전화기가 울렸다. 영업시간이 한참 지난 저녁 9시에 인터랙트 본사 프론트데스크로 전화를 걸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급히 주위를 둘러본 뒤 혹시 모를 누군가가 벨 소리를 듣지 못하게끔 수화기를 낚아채 귀에 가져다 댔다.
”정수연. 맞나요?”
익숙한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네. 정수연이에요. 저 방법을 찾았어요, 제가 도울 수 있어요.”
수연은 며칠 동안 기다렸던 재접선에 긴장감과 설렘이 몰려와 쉼 없이 말했다.
수연의 목소리만이 울리는 고요한 로비에서 유리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휙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금발의 여자가 통창밖에 딱 붙어 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밖은 어둑해진 지 오래였지만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마치 빛을 내듯 환히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어정쩡하게 손바닥을 펼쳐 인사를 했다. 앞으로 수연이 할 일은 인터랙트 본사에서 절대로 알면 안 되기에, 수연은 여러 군데 달린 씨씨티비를 인지하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수연의 시선은 여자를 지나쳐 로비를 한번 쭉 둘러보았고 마치 무슨 전화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떨리는 손을 최대한 단정히 움직이며 천천히 짐을 싼 뒤 퇴근증을 찍고 오피스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