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 Oct 18. 2024

Chapter 13. 진정한 교감

우리가 애타게 소원하던 그 것

    날이 흐리고 으슬으슬한 아침부터 유람은 혼자 부지런하게 가방을 쌌다. 한껏 들떠서 이것저것 챙기는 유람을 보며 유선이는 이불속에서 작은 머리만 빼꼼 내놓은 채 이 광경이 신기하다는 듯 갸우뚱거렸다. 몇 년 만의 장기 휴가인지, 유람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밖을 보면서도 날씨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유람의 회사에서는 유람의 무단결근 건을 쌓여있던 보상 대체 휴가로 처리해 주었다. 몇 년째 쉬지 않고 일만 하였던 게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이야, 유람은 자신을 해고하지 않은 회사에 고마우면서도 그동안의 놓쳐버린 시간이 마음 시렸다. 원래는 인터랙트를 찾기 위해 낸 장기 휴가였지만, 이젠 더 이상 인터랙트를 찾고 싶지 않았다. 


    유람이 유선에게 주고 싶은 삶은 고작 인터랙트가 결말까지 정해버린 삶이 아니었다. 유선이 직접 고민하고 선택하며, 후회하고 실망하는 그런 삶을 주고 싶었다. 총기 없이 빛바랜 눈으로 평생을 기대도 없고 실망도 없는 삶을 살아온 자신과는 다른 삶을 주고 싶었다. 선택이 있기에 후회가 있는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엄마, 우리 어디 가?”


    유선이는 평소보다 더욱 높은 피치의 목소리로 설레어하며 물었다. 유람은 그런 아이 같은 유선이의 모습에 싱긋 웃었다.


    “책이 아주아주 많은 곳으로 가자. 그 책들에는 오래된 비밀 비법들이 가득할 거야.”


    유선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작은 손으로 바쁘게 일어나 자신의 작은 책가방에 이것저것 물건들을 넣었다.


    가장 가까운 도서관은 서울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환경단체들은 종이책 출판 금지를 요구했고 이에 대부분의 책은 점차 전자책으로 돌려 출판되었다. 해당 단체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믿으며 의기양양했지만 사실상 전자책 도입의 이유는 적재 공간의 효율화와 실물 책보다 용이한 보존력 때문이었다. 따라서 활발히 연구가 이어지던 학술서적들은 대부분 전자책으로 출판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종이책으로 남아있는 몇몇 분야의 책들이 있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책을 넘기는 손맛이 독서의 큰 매력 중 하나가 되는 분야였는데, 예를 들자면 만화책이나 잡지 그리고 시집 같은 일종의 유희나 문학적 가치를 갖는 책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도서관의 반절 이상은 전부 만화책으로 가득했고, 나머지 책장들을 오래된 연구 서적들로 채워져 있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런 유희 서적들보다 훨씬 재미있는 여가 활동들이 많았기에, 도서관에 유희를 찾으러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도서관 분위기를 하나의 이색적인 여가 활동으로 인지한 젊은 커플들이 종종 들러서 책을 읽고 가는 정도였다. 


    유람과 유선은 커다란 사각 책상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각자 읽을 책을 골라 오기로 했다. 무사히 어린이 만화 섹션에 유선이를 데려다준 뒤 유람은 복도 깊은 쪽에 위치한 아동심리학 섹션으로 이동했다.


    한참을 서성거리다 몇 권의 책들을 집어 들었다. 수십 년 전 집필된 아동의 정서발달에 대한 책들은 유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다양하고 전문적이었다. 한 책은 뇌과학적 측면에서 아이의 유전적 성향들이 사회적인 요소들과 결합되어 발달되는 양상을 설명한 책이었다. 또 다른 책은 유아기에 필수적으로 경험해 보아야 하는 몇 가지 시나리오들을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었다. 유람은 어느새 네 권이나 쌓인 두꺼운 책의 탑을 품에 안고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곱씹었다. 그동안 인터랙트에만 의존하며 여러 사회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정신학적 사실들을 외면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깨닫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달랬다.


    유람은 자리로 돌아와 어느새 동화책 몇 권을 쌓아놓고 마치 어른이라도 된마냥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유선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작은 만두 같은 손가락들로 책장을 쪼물딱 거리며 조심스럽게 넘겼다. 아직 바닥에 닿지도 않는 짧동한 다리는 신나는 듯 흔들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런 유선이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게끔 유람 또한 조용히 옆에 앉아 한동안 책을 읽었다.


    유람의 걱정보다 훨씬 술술 잘 읽히는 잘 쓰인 글들이었다. 유선이는 이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하품하며 졸기 시작했다. 유람은 조용히 푹신한 의자 두 개를 끌어다 붙인 후 유선이를 눕혀 자신의 가디건을 벗어 덮어주었다. 어디에서도 금세 잘 잠드는 유선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다시 책 읽기에 열중하며 오후를 보냈다.


    유람은 그 후에도 때론 유선이와 함께 그리고 때론 혼자서 도서관을 찾았다. 다시 회사에 복귀하여 일을 하기 시작했기에 이전처럼 자주 오진 못하더라도 주말마다 하루는 꼭 시간을 내어 도서관에서 육아서적들을 읽었다. 이런 하루들이 쌓여 몇 주가 흐른 뒤 유람과 유선이의 관계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유람은 유선이의 행동 그 자체만이 아닌 행동을 만들어낸 의도나 원인에 대해 물어보았고, 유선이의 표현 방법들을 깊이 관찰하며 아이의 정서적 안정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다.


    유람이 특히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은 유선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려 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하루를 거듭하며 유람은 점점 어린 유선에게 선택권을 전적으로 쥐여주는 것이 때론 아이에게 큰 부담감이나 당혹스러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유람이 유선이에게 물었다.


    “유선아, 해보고 싶은 악기나 활동이 있어?”


    유선이는 갖고 놀던 인형을 잠시 내려놓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오른 듯 화색이 돌며 자신 있게 외쳤다.


    “대왕 젤리곰 어깨에 타서 날아가기!”


    유람은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살짝 당황하였지만 최대한 표정을 숨기며 다시 물었다.


    “음, 그것도 정말 재밌겠네. 그런 다른 멋진 일은 또 없을까? 예를 들면 피아노를 친다거나, 수영한다거나, 춤을 추는 것 같은 다른 일들!”


    유선이는 흥미가 떨어진 듯 어깨를 한번 으쓱 올렸다 내리며 모르겠다 말한 후 다시 인형을 갖고 놀았다.


    그 외에도 조금 고차원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 예를 들면 가고 싶은 레스토랑을 고르거나 가족 여행지를 고를 때의 순간들에는 여러 개의 선택지를 설명하는 일부터가 유선이에겐 종종 듣기 싫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유람은 이런 일련의 순간들을 경험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유람의 고민을 듣던 선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선이의 삶에 영향을 주는 선택들은 최대한 유선이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다는 너의 마음은 흠잡을 데가 없어. 하지만 유람, 어쩌면 우리가 부모로서 인도해 주는 선택들도 있는 게 진정한 자유 아닐까? 자유와 책임은 너무 가까이 있는 두 존재라서, 유선이에게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줌과 동시에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양의 책임 또한 지우게 될지 몰라.”


    유람은 선우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벙찐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자유를 앞세운 유람의 계획에는 어린 유선에게 그 책임을 모두 돌리는 일과 비슷했다. 어쩌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낀 불만과 분노를 유선이도 자신에게 느끼게 될까 두려운 나머지 자신이 유선이의 영역에서 급히 발을 빼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차갑게 스쳤다.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의 어릴 적 상처가 유선이에게 고스란히 뒤엉킬 뻔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기 무서웠다.


    “당신 말이 맞아. 나는 어쩌면 유선이가 언젠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 자신의 삶을 만족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웠나 봐. 자신의 삶을 여기로 이끈 여러 선택의 길목에서 꼭 틀린 선택들을 했다고 나를 원망할까 무서웠나봐. 내가 우리 엄마에게 그랬듯 말이야.”


    조금은 힘이 풀린 듯 맥이 빠진 목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각자의 생각 더미들 사이에서 몇분을 침묵 속에 마주 앉아 있던 중, 선우는 좋은 생각이 난 듯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유선이의 동의를 받고 대신 선택을 내려주는 건 어때? 제대로 위임받은 선택 대리인처럼 말이야. 대신 언젠가 유선이가 그 선택에 대해 돌아보고 싶을 때를 위해 그 결정의 순간마다 왜 이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기록해 두는 거야.”


    유람은 선우의 채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들을 듣던 중 눈물이 가득 차올라 떨궈지기 시작했다.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게 너무 오랜만인 듯했다. 유람은 선우와 함께 떠오르는 영감들을 잊지 않기 위해 써 내려갔다.


<선택 사유서> 

어떤 복잡하거나 중대한 사안들에 대해 이유선 양의 동의 하에 부 이선우와 모 이유람이 대신 선택을 내려주기로 한다. 

두 대리인은 사전에 충분한 논의를 통해 의견을 한 개로 수렴하여 함께 선택을 내린다. 

각 선택에는 두 대리인의 선택에 대한 주장과 이유를 자세히 작성한다.

    

유람과 선우는 머리를 싸매고 작성한 선택 사유서를 가지고 유선이에게 다가갔다.


    “유선아. 이것 좀 봐.”


    유람은 태블릿 화면을 내밀며 쓰여 있는 글들을 읽었다. 유선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조금씩 유선이의 이해 수준에 맞게 설명 들을 보태가며 오랫동안 내용을 전했다. 한참 설명을 완료한 뒤 유람은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엄마에게 유선이의 선택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줄래?”


    유선은 정확히 이해한 건지 모르겠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평소와 다른 이벤트에 조금은 신이 난 듯했다.


    작은 유선이의 손에 쥐어진 전자펜으로 자신의 이름을 삐뚤빼뚤 적어 서명했다. 유선이의 첫 서명이었다.


    “엄마 아빠가 유선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선택할게. 언젠가 유선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잘 고민해서 기록해 둘게.”


    유람은 스멀스멀 피어나는 막중한 책임감과 기분 좋은 부담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유선이를 끌어안았다.


-


    유람은 여느 날처럼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높은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선이는 동화책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여서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퍼즐 놀이를 하곤 했다. 유람은 지난번, 지지난번 방문 때에도 찾으려 애를 썼지만 늘 누군가가 먼저 대여해갔던 장 피아제의 발달심리학 이론을 꼭 빌려 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연장할 수도 없는 기간이 되었으니, 오늘은 그 책 없이는 도서관을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신의 모습에 풉 웃음이 났다. 이렇게 무언가에 진심이었던 게 얼마 만이던가. 유람은 사서가 오늘 반납된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두는 것을 바라보며 아동심리학 쪽 섹션으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사서가 빈 수레를 끌고 나오자마자 유람은 종종걸음으로 책이 속한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도서관에 순서대로 정렬되어 있는 책들의 나열 원리를 능숙하게 익히지 못한 유람은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살폈다.


    “혹시 이 책 찾으시나요?”


    화들짝 놀라 휙 뒤돌아보니 유람에게서 몇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세월이 멋지게 스쳐 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거의 백발에 가까운 긴 머리를 짧게 밑으로 묶어두었지만, 얼굴은 그의 머리칼에 비해서는 조금 더 젊어 보였다. 살랑이는 연갈색 린넨셔츠를 입은 남자의 손에는 유람이 찾던 책이 들려있었다.


    “네, 어떻게 아셨나요?”


    “다른 책들은 다 두 권씩 있는데, 이 책만 한 권밖에 없거든요.”


    남자는 유람의 반응을 조금 살피며 책을 내밀었다. 유람은 어색한 듯 살짝 목례하곤 책을 받았다.


    “아주 좋은 선택이에요. 이 책에서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어린 나이부터 논리적인 인식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죠. 요즘 세상에서는 꽤 무시되는 주장 같지만요. 이 오래된 도서관에서 아동발달학 서적을 찾는 사람도 거의 저 빼고는 없었는데 몇 주 전부터 이쪽에서 많이 봤어요. 언젠가 짧게라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죠. 함께 온 아이는 딸아이인가요?”


    남자의 정감 있는 말투와 편안한 표정에 유람은 꽉 잡고 있던 경계망을 살짝 낮추었다.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짧게 말했다.


    “네, 제 딸이에요.”


    남자는 살짝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추가로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이런 책들을 읽고 있나요? 요즘 세상에선 인터랙트가 곧 모든 책의 집합이자 아이만을 위한 맞춤형 육아서적일 텐데요.”


    유람은 그제야 그의 대화 목적이 이해된 듯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맞아요. 인터랙트는 대단한 시스템이에요. 하지만 그만큼 모든 건 양면성을 갖는다고 하죠. 과유불급의 세상에서 저는 조절을 잘 못하는 편이라 아예 시작도 안 하려 하는 것뿐이에요.”


    남자는 의아한 듯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터랙트의 양면성은 무엇인가요?”


    유람은 자신의 속마음을 처음으로 입밖에 내뱉는 순간임을 인지하고 긴장과 설렘에 침을 꼴깍 삼켰다.


    “자유의 부재요. 그리고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점이요. 어쩌면 아이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죠. 자유를 갖고 있음을 알기에 독립적인 존재로서 선택을 내릴 줄 알게 될 것이고, 사랑받음을 느끼기에 사랑을 나눌 줄도 알게 될 테니까요. 아무리 인터랙트 자체의 의도가 좋다고 한들, 사용하는 자들이 그 의도를 명분 삼아 자신들의 남용을 정당화시키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남자는 아픈 구석을 찔린 듯 한참을 말없이 바닥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을 하는듯한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사용하는 자들이 명분 삼은 의도는 무엇인가요?”


    “인터랙트가 상징하는 것들 전부겠죠. 사랑, 걱정, 교육, 컨트롤 모두요. 부모라는 직함은 너무 큰 보호막을 형성해요. 부모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아이에게 행하는 행위들은 대부분 정당화되곤 하니까요. 인터랙트도 부모의 사랑이라는 방패를 쓰고 있어요. 그 뒤에 숨겨진 부모들의 욕심, 소유욕, 열등감, 분노, 이기심은 덮어둔 채요.”


    유람은 어느덧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서 그를 설득하듯 말하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들이 그저 자신의 의견이 아닌 신념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잠잠히 듣던 남자는 자신을 최광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유람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광은 자신이 인터랙트를 개발한 사람이자 초기 설립자라고 밝혔다. 그의 앞에서 인터랙트의 단점들을 열띠게 설명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 유람에게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만들긴 했지만, 저 또한 인터랙트로 큰 화를 입었던 사람이거든요. 오랜 시간 동안 인터랙트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을 찾기 위해 많은 전통 서적을 공부했어요. 아이의 성장이나 정신발달에 대한 내용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궁금해할 법한 이론이나 육아 방식에 대한 고찰을 정리한 자료들이 제 사무실에 있는데요, 시간이 되시면 딸과 함께 보러 오시겠어요?”


    이런 사람을 속히 조력자라고 하던가. 유람은 실마리를 풀어나갈 은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이야기한 뒤 유선과 함께 최광의 사무실로 향했다. 유람은 최광의 발자국을, 유선은 유람의 발자국을 따라 노을 속으로 걸어갔다.


-


    오 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낡아 보이는 컨테이너형 사무실이었다. 유람과 유람의 손을 꼭 잡은 유선이는 최광의 초대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최광의 사무실은 깔끔한 스틸 소재의 책상 두 개와 의자 네 개가 정렬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한켠에는 조금 더 따스한 느낌을 담은 갈색 카페트와 가죽 소파로 손님을 맞을법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놓여있는 화분과 찻잔들, 그리고 길게 늘어 뜨러 져 있는 붉은 덩쿨 식물은 최광의 공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공존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무실 속 두 책상 중 한 개의 책상에서는 작업하는 듯 컴퓨터를 두드리는 어린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유람과 유선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최광은 그녀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인사해요. 이쪽은 저와 함께 일하는 정수연 양입니다. 수연 양, 제가 오늘은 예상치 못하게 손님을 두 분이나 모셨네요. 시간이 괜찮다면 함께 대화를 나누면 어떨까 해요. 제가 이슬차를 내어드릴게요.”


    수연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녜요, 대화 나누세요. 차는 제가 내어올게요.”


    수연에게 감사를 표한 뒤 최광은 유람과 유선을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낡은 나무 의자를 한개 끌어와 앉은 최광은 유선에게 루빅큐브를 건네주었다. 유람도 어릴 적에 얼핏 본적은 있지만 거의 만져본 적 없는 루빅큐브를 유선이는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다.


    “여기 가운데에 흰색이 있는 면에 십자가 모양으로 흰색 면들을 옮겨두면 돼. 이렇게 말이야.”


    그는 유선이의 놀란 탄성을 들으며 휘릭 휘릭 루빅큐브를 돌렸다. 능숙한 그의 솜씨에 유선이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자신도 해보고 싶다며 루빅큐브를 다시 냉큼 받아 갔다. 그런 유선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최광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유람에게 이어 말을 걸었다.


    “수연 양을 처음 만났을 때 수연 양은 인터랙트 본사 막 입사한 사원이었어요. 저는 그 당시 제가 개발한 인터랙트로 인해 희생된 아이들을 보며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던 때였고요. 아, 그 희생된 아이들 중에는 애석하게도 제 딸아이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의 짧은 몇 마디 속 담긴 무거운 슬픔과 시련이 유람의 목젖에 맺혔다. 유람은 어느새 쟁반 가득 차를 내어온 수연에게서 찻잔을 받아서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핵 폭탄을 개발했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수년간 저는 제가 시작해 버린 이 거대한 오류 체계를 파괴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어요. 그때 제 구원자처럼 수연 양과 스테파니라는 외국인 여성이 이 사무실을 찾아왔어요. 스테파니라는 여자는 어디선가 훔쳐 온 인터랙트를 들고 와서 벌벌 떨며 자신의 아이로 유저 등록을 변경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당연히 인터랙트에 큰 반심을 갖고 있던 때라 그녀의 부탁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녀를 보면서 마음이 바뀌었죠.”


    최광은 마치 그 외국인 여자가 서 있던 공간을 회상하는 듯 멀리 쳐다보며 설명한 뒤 사색에 잠겼다.


    “어떤 모습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나요?”


    유람은 다음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답을 이어 해준 사람은 수연이었다.


    “에메랄드보다 푸른 빛의 눈을 가진 그 여자는요, 진심으로 자신의 아이를 사랑했어요. 오로지 그 아이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들을 걸고 매달리고 있었어요. 그런 여자라면 인터랙트도 방향을 바꿀 수는 없어요. 옳은 길, 더 나은 길로 나아가겠다는 방향이요.”


    유람은 그 이후로 몇 시간 동안 수연과 최광의 연구자료들과 이야기를 들으며 해가 질 때까지 머물렀다. 유람은 어느새 잠든 유선이를 소파에 눕혀주었고 최광은 보드라운 담요로 작은 아이의 몸을 포근하게 덮어주었다. 새근새근 자고있는 유선이를 보는 최광의 눈빛엔 그리움이 듬뿍 묻어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지 않게 유선이를 품에 안고 유람은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 만남에는 자신의 집으로 그들을 초대하겠다는 말을 남긴 뒤 유람은 집으로 향했다.


-


    집에 돌아온 유람은 저녁밥을 해두고 기다리던 선우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부 이야기했다. 선우는 믿기지 않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유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최광과 수연에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자고 했다.


    유난히 길었던 일정들을 뒤로하고 따뜻한 샤워를 마친 유람은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말렸다. 수분을 머금어 조금은 무거운 머리칼을 휘휘 저으며 적당히 따뜻한 바람에 머리를 말렸다.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말리다 보니 주변의 모든 공기가 안락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오랜만에 질서 없이 흩어져있던 모든 것들이 안정적으로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푹신한 침대에 앉아 스탠드 조명을 끄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찰나에 화장대 위에 걸려있는 에메랄드 목걸이가 유람의 시선을 잡았다.

유람은 사뿐히 일어나 천천히 화장대 앞에 앉아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푸른 에메랄드 보석은 유람의 손바닥 위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낮은 조도의 노란빛 조명을 받자, 평소보다는 조금 더 녹색에 가까운 반짝임을 드러냈다.


    유람은 그 자태를 한참이나 쳐다보다 어렴풋이 한강공원에서 부딪혔던 푸른빛 눈동자의 그녀를 떠올렸다. 그 여자의 모습은 사진처럼 한 찰나밖에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람은 왜인지 그 여자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의 온기가 그녀에게 닿길 바라듯 푸른빛 에메랄드 보석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닦았다.


    당신이 걸어갈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길 조심스레 바랐다.

                    

이전 14화 Chapter 12.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