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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Oct 18. 2024

Chapter 12. 편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았던 발걸음

    최광을 만난 날부터 수연은 깊은 심연 속에 사로잡힌 듯 무료함에 빠졌다. 더 큰 너머의 무언가를 경험해 본 자들이 초연해지는 까닭을 수연도 몸소 깨닫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대리석의 바닥과 수천만 원 상당의 샹들리에도 더 이상 멋져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인터랙트 본사의 무정함의 규모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작품들 뒤에는 인터랙트가 숨겨둔 수많은 부모와 아이들의 눈물로 가득 차 있겠지. 수연은 초점 없는 눈빛으로 형식적인 업무들을 해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어떤 젊은 남자가 인터랙트 본사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그는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기에 그가 누군지 알 방법은 조금도 없었다.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그는 당당하게 중앙 복도를 지나 수연이 서 있는 리셉션 데스크까지 도착했다.


    “정수연 님이신가요?”


    그는 수연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수연에게로 향했다. 수연은 의식하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수연에게 봉투 한 개를 건네주었다.


    “이슬 찻잎을 조금 담았어요. 집에 가서 드세요.”


    수연은 번쩍 정신이 깨어나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곧이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이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인터랙트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떠나자마자 동료들은 수연에게 다가와 관심을 보였다. 연애편지냐며 짓궂게 묻는 영우 선배에게 수연은 그저 멋쩍게 웃으며 비밀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루 종일 봉투의 정체를 알려달라며 졸라대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수연은 일정이 있다며 정시에 인터랙트 본사 문을 나왔다. 두근거리며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수연에게 저녁 메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어머니께 상관없다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새 꼬깃해진 봉투 속에는 흰 종이호일로 감싸진 이슬 찻잎 한 주먹과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정수연 양, 당신의 이름조차 모른 채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었네요.


    함께 오셨던 여자분께는 이슬 찻잎을 한 병 드렸지만, 경황이 없어 수연 양에게는 전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어요. 삶이 씁쓸할 때 한 잔씩 따뜻하게 우려내어 드셔보세요. 꽤나 도움이 된답니다.


    그날 이후로 수연 양의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내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당신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요. 내가 느꼈던 미시감을 당신도 느꼈다는 게 큰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걱정이 됩니다. 어쩌면 당신도 이제 당신의 직장이 원망스럽고, 당신이 하던 일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 또한 아직 인터랙트를 용서하진 못했지만, 이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어요. 


    저는 드디어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제 딸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사실 인터랙트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었어요. 제가 수년간 찾아 헤매도 답이 없었던 이유 또한 거기에 있죠.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인터랙트가 아니라 바로 나였으니까요.


    당신과 함께 온 푸른 눈의 여자를 보며 깨달았어요. 그 여자의 손에 들어간 인터랙트의 쓰임과 내가 쥐고 있던 인터랙트의 쓰임의 차이를요. 그 여자는 내가 처음 인터랙트를 개발할 때의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여자였어요.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를 위해 최선의 선택들을 만들어 내주고자 하는 희생적인 마음이요. 그런 마음으로 인터랙트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어요. 나는 그 마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지만요. 사랑의 부재로 뒤틀려진 인터랙트가 내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어요. 어느 순간부터 저는 인터랙트를 성가신 육아를 대신 해주는 육아 대체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었거든요. 최고의 선택을 내려주기 위함이 아닌, 나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터랙트에 의존했어요. 나의 고민과 정성을 덜어내기 위한 편리 품으로 인터랙트를 사용했어요.


    결국 문제는 나였던 거예요. 그러니 정수연 양도 자신의 일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당신은 누군가에겐 좋은 일을 해준 사람일 겁니다.


    내가 추적할 수 있는 신원은 정수연 양밖에 없어서 직접 글을 쓸 수는 없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초록 눈을 가진 여자분께 감사의 마음을 꼭 전해주세요.


    그럼, 평온하시길.”


    그 어디에도 최광의 이름은 없었지만, 최광의 흔적으로 가득한 편지를 들고 수연은 깊은 동질감에 안도하며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잘 접어둔 편지지를 서랍에 넣어두고는, 이슬 찻잎 한 움큼을 손에 쥐고 거실로 나갔다. 오랜만에 함께 차를 마시자는 수연의 말에 어머니의 얼굴에는 따스한 화색이 돌았다. 그 둘은 그날 저녁 내내 이슬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고, 수연은 인터랙트를 그만 두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어느새 수연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치 진영을 처음 만났을 고등학교 2학년 그 찰나의 순간부터 수연을 짓눌렀던 부담감과 죄책감이 이제야 덜어지는 것 같았다. 최광의 사무실을 떠나던 순간 스테파니의 푸른 눈동자에 비쳐졌던 희망과 최광의 온정 담긴 편지가 수연의 바위 같은 괴로움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수연을 품에 안고 토닥거리던 어머니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수연이 어떤 어려운 날들을 보냈는지 짐작이 된다는 듯 수연의 어깨를 쓸어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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