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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스의 논리

by 이채 Jan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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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설득의 세 요소로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언급한 이래 무수한 사례들이 즐비하게 등장했다. 로고스가 내용의 증명 과정이라면, 에토스는 일종의 권위라 할 수 있다. 한편 파토스는 감정을 이입하게 유도한다. 그리하여 가령 독자가 ‘로고스’로써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파토스라는 감정 이입이나 에토스라는 권위로 퉁 치는 사태 또한 여전히 그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 셈이다.

로고스로서의 설득력이 얼마나 그 내용의 짜임이 개연성 있는 인과로 구성되었는가로 가늠될 수 있다면, 파토스로서의 설득력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위 ‘동일시’할 수 있는 감정적 유대를 산출하는가에 있다. 그러나 에토스는 이 둘 사이를 진자운동처럼 왔다 갔다 하며 그 정의를 모호하게 유지한다 할 수도 있으리라.

화자의 권위(에토스)가 가령 그 자신의 도덕성에 있다 치자면,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감정에 동일시하게 하는 정도가 얼만지에 그 설득력이 가늠되는 까닭에 그의 에토스는 파토스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화자의 권위(에토스)가 그의 증명 과정으로써 ‘내용(로고스)’에 있다면, 인용 자체는 예의 증명 과정을 통째로 인용하는 효과를 낳는다.

감정(파토스)을 배설하게 승인하는 동일시(퇴행)를 경유하는 설득 방식으로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의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첫 번째로는 누군가를 같이 욕하는 것(싸움-도주)이다. 두 번째로는 특정 누군가가 무슨 문제든 다 해결해 줄 거란 의존을 유발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아질 근 미래가 도래할 기대감으로 무리를 고조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퇴행을 경유하는 건, 모든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신의 책무라는 어떤 기본 전제를 여타 허수아비를 제물 삼아 ‘도망’칠 수 있게 허용하는 일관성을 가진다.

스스로 고민해야 할 또 서로 논의해야 할 지난한 여력을 아웃소싱하는 건, 일종의 충성을 서약하는 방식으로든 뭔가 신앙하는 방식으로든 마찬가지의 퇴행에 다름 아니다. 이를테면, 유명한 누구 또한 저만치나 퇴행했다면 그만큼 위로가 되는 것이다(혹 그렇지 않은 누군가가 언제고 그리 실수하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인용구가 어떤 로고스를 집약하고 있는가로서의 설득력이 아니라, 인용구의 주인이 내 편인가 네 편인가 하는 맹목 감상은 기실 파토스인 동시에 에토스일 테니.

예컨대 바슐라르라는 철학자 호소인은 그의 책 [물과 꿈]을 저술하며 다음의 [은유(이입)]를 [요하힘 가스케]의 [나르시스]로부터 인용한다. [세계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거대한 나르시스이다.] 이 문장은 저자(여기에선 가스통 바슐라르)의 정서 발달 상태나 당시 정서 양태(그러니까 기분) 외엔 무엇도 설명하지 않지만, 어떤 독자는 그로부터 무슨 [설득력]을 헐레벌떡 도출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나르시스]라는 인용구 저자의 자의적 공식은 이제 저자가 독자와 같은 편인지 여부에만 그 설득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거기엔 아무런 증명이나 개연성이 없으므로, 이는 로고스의 집약 형식으로서의 에토스가 아니라 파토스의 전염 양태(감정 호소나 배설)로서의 에토스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식의 형태가 아닌 호소하는 선전물의 양태로 트라우마를 전염시키면서[만] 설득을 시도한다면, 내 편 아니면 네 편, 그러니까 가령 누군가 스스로 이입한 인물의 오류를 조금이라도 더 부정하기 위해 서둘러 반대편 진영 누군가의 오류를 외치며 이입한 인물의 덜 오류를 주장하는 분노의 상호 투사가 영영 이어질 테다. 허나 두 인물 오류 각각이 서로 무슨 상관이겠나.

인용된 이가 유명하든 아니든, 설득력에 로고스가 없다면 [인용구]는 일종의 정치적 선전 표어로 전락한다. 저 파토스적 퇴행을 유발하는 동어반복의 표어에서 종종 발견되는 흔한 응석들이 있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다는 동어반복에서 추론 가능한 건 무슨 타당한 미지의 근거가 따위가 아니라 어떤 트라우마적 감상에 불과할 테니. 집단의 트라우마란 [공론(설명)] 속에서[만] [지속] [발달]할 테지만, 예의 공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맹목]은 그저 거꾸로 가는 [퇴행]의 증거이기에 [설명하기 싫어 설명할 수 없다]는 [순간] ‘기분’에의 [퇴행]적 고착만 증거할 따름이겠다. 동어반복으로[만] 이루어진 [사병]의 [충성] 맹세나 신앙, 혁명, 카리스마, 이념, 심지어 [이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념] 등 [상상(망상)] 따위의 무수한 [맹목(도착)]이 으레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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