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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波高): 형태를 가지려다 이내 흩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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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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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목차
0.1 서론
1장. 경계의 탄생
1.1 영토
1.2 자취
1.3 진화
2장. 붙잡을 수 없는 이름
2.1 작명
2.2 유속
2.3 바람
3장. 기억, 흐르는 조각들
3.1 잠영
3.2 조각
3.3 틈
4장. 감정, 표류하는 파동
4.1 파동
4.2 동요
4.3 울림
5장. 통증, 비틀린 궤적
5.1 균열
5.2 상흔
5.3 흔적
6장. 타자와의 접점
6.1 접촉
6.2 틀어짐
6.3 간극
7장. 언어, 흘러내리는 그물
7.1 틀
7.2 금
7.3 파편
8장. 시간의 궤적
8.1 순간
8.2 반복
8.3 차이
9장. 운동하는 무늬
9.1 패턴
9.2 혼란
9.3 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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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서론
우리는 종종 만물이 영영 멈춰있을 거란 가정하에 계획을 세운다. 그게 다소 사소한 계획일지언정. 그러니까, 가령, 갈증을 해소하고자 컵을 댄 정수기에서 물이 흘러나오지 않을 적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영원히 고장 나지 않을 정수기와 같이, 그저 돌은 돌로, 나무는 나무로, 별은 별로 영원히 거기 있을 양 살피는 것이다. 허나 저기 저 정지한 듯 보이는 만물은 기실 거대한 운동의 일부일 텐데. 돌은 깨어지고, 나무는 자라며, 별은 타오르고 꺼진다. 무엇도 가만히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운동'이야말로 세계를 이룬다. 형태는 변한다. 구조는 무너지고 새롭게 짜인다. 삶이라는 유속도 마찬가지. 우리는 스스로를 일관적이고 절대적인 '나'라고 느끼지만, 실은 끝없는 감정, 사고, 기억의 움직임 위에 일시적으로 그려진 얼룩에 불과할 양인바. 마치 강물 위를 흐르는 기포처럼, 한순간도 같은 모습은 없다.
이토록 연쇄되는 운동은 단순한 이동이나 변화에 그치지 않을 터다. 이는, 모든 걸 [일시적으로] 구성하고 해체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마치 나뭇잎을 휘감는 바람처럼, 운동은 형체를 빌려 세계를 펼치고, 소멸시키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게 다만 운동의 결과만은 아닌 셈이다. 운동 중인 자체가 현실이겠으므로.
예컨대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볼 적, 우리는 고정된 이미지를 마주한다 느끼기도 한다. 허나 그 이미지조차 빛의 반사 운동이 만들어낸 한순간의 허상이리라. 실체는 없다. 오직 빛의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신체 역시 끊임없이 세포를 교체하고, 숨을 쉬고, 거듭 흐르는 운동 중인 덩어리 아니던가.
밤하늘의 별들은 찬란하게 박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론 질주 중이다. 우주는 팽창하고, 별들은 무너지고, 은하는 부딪히며 뒤섞인다. 거기 정지감은 인간의 느린 감각이 만들어낸 착시이며, 순간이란 과거를 사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편의상 구성한 가상의 정신적 단위에 불과하다. 언제나의 고요한 화면 배후엔 숨 가쁜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다.
인류는 오래도록 이 움직임을 고정하려 애썼던 모양이다. 가령, 영원한 형태, 영원한 의미, 변치 않는 진리, 본질 따위를 찾아 헤맨 양으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돌조차 모래로 부서지고, 신념 또한 흔들린다. 형태는 바뀌고, 경계는 흐릿해진다. 결국 남는 건 오직 운동뿐이다.
멈춘 양 보이는 모든 것의 배후엔, 무슨 운동이 ‘어떻게’ 꿈틀거리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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