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붙잡을 수 없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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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쥘 수 없는,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인간은 그리 오래도록 서성거렸다. 그처럼, 흐르는 세계를 인간은 두려워하였으리라. 그리하여, 하나의 오래된 시도가 거듭 태어나고는 했던 것이다. 이른바 ‘이름 짓기’가 그것이다.
돌부리를 가리켜 “산”이라 부르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를 “강”이라 불렀나니. 정녕 산은 처음부터 산이었나. 강 또한 영영 강이었을는지. 그러한 이름은 그저 운동하는 세계를 잠시 얼려 놓은 부표에 불과했을 모양인데.
우리는 온갖 요소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그리 부르며 무언가 붙잡았노라, 또 그리 붙잡고는 다룰 수도 있겠노라 착각하곤 했더랬다. 그러나 실상 이름부터가 흐름의 한 시점을 덮어씌운 기만 아니던가. 산이라 부른 그건 언젠가는 부식되고 깎여 강이 되고, 강은 또 메말라 평야가 되기도 하는 양. 그래봐야 작명은, 결단코, 여느 무슨 운동도 멈출 수 없겠으니.
어릴 적 동네 언덕을 ‘산’이라 불렀던 당시의 혹자에겐 예의 소박한 언덕이 거대한 세계처럼 다가왔겠으나, 그가 자라며 언제부턴가 그 언덕은 작디작은 둔덕에 불과했던 모양과도 같이. 이름이 세상을 고정하는 모양으로 보여도, 바로 그 이름조차 세상과 아울러 흘러가 버리는 불확실성 속에 아울러 영영 표류할 수밖에 없으리라.
저와 같이 유속 위로 던져진 갖은 이름들은 사진처럼 운동의 찰나를 포착해 붙잡고자 하나, 그 운동은 예의 작명 시도들을 한껏 비웃듯 끝도 없이 변모한다. 심지어 저기 저 흐르는 세계는 완벽한 작명을 위한 시간 따위조차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라는 일시적 신체와 휘발되는 정신조차 그러할진대. 그리 보면 여기 이 ‘나’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바뀌는 감정, 기억, 신체의 운동에 잠시 부여된 호칭일 뿐이겠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 또한 지금 이 순간과 결코 같지 않다.
물론 이 얼마간의 작명은 요술 같은 면이 있다. 우리 정신은, 어쨌거나 상상하는 등으로 사소하게나마 얼핏 작동하고자 할 적에조차, 그 최소한의 질료와 단위가 있어야 하겠으므로. 허나 기만은 영원할 수 없다. 바람을 손으로 움켜쥐려는 시도처럼, 이름은 단지 순간을 가리킬 뿐, 운동 중인 세계 자체의 그 무엇도, 그러니까 아주 잠시 잠깐의 찰나 따위도 결단코 붙잡을 수 없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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