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세계에서 근로자로 일하고 있으면 ‘생산성’이라는 말을 모를 수가 없다. 자본을 틀어쥔 조직과 사장은 생산성을 신봉한다. 거의 모든 기업, 심지어 공공기관과 정부에서도 행하고 있는 성과 평가라든지 프로세스 개선 논의 등은 넓게 보면 근로자의 생산성을 평가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늘려보려는 속셈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생산성 있게 일하는 사람, 혹은 ‘일잘러’가 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에는 분명 여러 가지 맥락이 있으나 저 안에 기득권이 선호하는 노동 윤리가 숨어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생산성이 높아진 만큼의 대가가 힘없는 개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어쩌면 근로자 한 명의 생산성이 늘어난 만큼 그에게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어져 누군가는 회사에서 잘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일을 잘해서 포상으로 받은 연봉 상승이나 보너스가 가중되는 업무의 무게, 야근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상쇄될 것이다. 일을 잘하게 된 사람과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 모두 불행해지고, 여기에서 웃는 사람은 인건비를 줄이게 된 자본가뿐이다.
자본가는 생산성이라는 거대 가치가 가리고 있는 다른 것에 별로 예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얻어가는 자본과 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최고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생기는 결실을 제대로 분배받지 못하는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사장님들보다 훨씬 소박하고 일반적인 처지에서 산다. 그런 나에게 생산성의 증대와 직결되는 과잉 생산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균형, 자아실현, 행복, 건강, 가족의 안정 등이다. 자본주의적인 지표로 결코 계산되지 않는 것들이고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지표들이 애써 가리려 하는 것들이다.
생산성이 늘어나며 쌓이게 된 생산물이 열악한 사람들에게 기부되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과잉 생산물은 소비되는 게 목표다. 즉 누군가가 돈을 써야 하고, 그걸 노리는 온갖 광고들이 판을 치며 화려하지 못한 개인의 열등감을 자극한다.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으면서 받았던 포상들이 나를 떠날 수 있는 경로가 구축되는 것이다. 영적인 풍족함과 자아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면 그런 함정에 현혹되지 않겠지만 일터에서 오래 노동을 하며 나의 내면을 챙기기란 너무 어렵다.
내가 최근에 아주 인상 깊게 읽은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는 장시간 노동이 집안일을 비롯해 ‘각종 정비를 위한 여유를 앗아가기에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더 상품에 의존하게 된다’고 이런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느리지만 건설적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도 그럴 시간이 없어 굳이 먹어도 되지 않을 단 음식을 먹거나 쇼핑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개인에게 ‘생산적인’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 역시 일터에서 나에게 강요한 만큼을 해내기 위해, 그러니까 나에게 멋대로 할당된 ‘생산성’에 다다르기 위해 나를 채찍질하다가 건강을 잃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물론 몸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다고 위로나 보상을 받지는 못했고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 생산성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에 개개인이 왜 붙잡혀 살아야 할까?
게다가 이 세상이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관념을 주입하려고 해도 돈으로 가족의 사랑이나 친구의 신뢰, 나의 철학을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감정, 내면의 발전 같은 개인의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은 생산성을 높여서 더 돈을 번다고 절대로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내가 충실하게 시간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하고 좋은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나 자신과 대화해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간을 할 수 있는 여유를 통근을 합하면 평균 10시간 이상이 되는 근무로 잃어버리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환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