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전집
2023년 4월 15일.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고 언니는 학원을 다니느라 바빴다. 어린 나는 갈 곳이 없어 도서관에 맡겨졌다. 도서관이 아늑하게 느껴진 건 아마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 덕분일 거다. 도서관은 매일 푹 빠져서 놀 거리가 가득했고 아무도 나를 혼내거나 쓸쓸하게 만들지 않았다. 나에겐 집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도서관에 가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책을 읽는 사람들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초등학교 도서관엔 수험생이 없기에 사람 자체가 드문 편이다. 그래서 혼자 나무 의자에 앉아 노을 햇살이 비춰주는 책장을 넘기고, 내 책장 넘기는 소리로 귀가 가득 차고, 글에 빠져서 아득해지고... 이 감각을 즐겼다.
한 사서 선생님은 잔잔히 책장을 넘기던 나를 옆에 앉히곤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눠주시기도 했다. 처음 옆자리를 내주신 그 날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이후 꽤 자주 선생님 옆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가시게 되셨을 무렵, 나에게 어떤 책이 더 읽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그 때 나는 음악가의 생에 빠져있었다. 선생님께 용기 내서 그 이야길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의 가장 앞 서고는 음악가의 생을 다룬 시리즈 책으로 가득 채워졌다. 새로운 책이 가득 생겼다는 설렘보다 선생님이 떠나신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는 당연한 세상의 규칙에 따라, 선생님은 봄이 되어 학교를 떠나셨다. 남은 나는 그 해에도 도서관 나무 의자에 남아 선생님의 선물을 하나씩 읽었다.
조금 큰 아이가 되어서는 도서관보다 학원을 전전했고 도서관에 머물며 시리즈를 읽어나가기엔 주어진 시간이 적었다. 또 책이 아닌 놀거리를 많이 마주했다. 그래도 도서관은 여전히 나에게 아늑한 비밀의 공간이었다.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가는 수험생이 되어서도, 가끔은 문제집을 덮고 도서관 구석에 자리 잡고는 햇살에 비춰서 책장을 넘기곤 했다.
시간이 빠르게도 흘렀다. 어느새 학생이라는 이름의 끝을 걷고 있다니. 그런데 난 여전히 도서관에 간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사람이 대다수지만, 현재의 나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나에게 그 선생님은 그런 존재이다. 내 어릴 적 아늑함의 감각과 선생님이 주신 행복한 감각이 어우러져, 아직도 균일히 짜 맞춰진 총서를 보면 가슴이 뛴다. 특히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그런 존재이다.
그 중 처음으로 집어 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도, 먼 길 돌아 나의 아늑한 감각을 다시 찾은 내 씁쓸함을 되살리는 책이었다. 나에게 도서관에 대한 행복한 기억 조각을 선물해주셨던, 그 선생님은 잘 지내실까? 어디에 계시든, 선생님의 봄 도서관도 언제나와 같이 아늑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