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아이답지 않게 성숙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말을 잘 듣는 것보다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게 더 어려운 아이였다. 8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으름장을 그대로 놓아 버릴 때면 청소로 마음의 부채를 덜곤 했다. 친구들이 떠난 사이 바닥에 가라앉은 검고 매캐한 먼지를 쓸고 닦았다. 뒤편 사물함 위에 앉아 붕 뜬 다리를 흔들며 깨끗해진 교실을 휘이 둘러보고 있을 때 운동장에 있던 친구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친구들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형형색색의 종이끈을 찢어 빗자루의 거친 머리카락마저 닿기 어려운 책상다리 틈으로 내팽개쳤고, 여러 켤레의 흙 묻은 신발 밑창에서 떨어져 나온 모래 알갱이들은 바닥 위를 굴러다니며 서걱거렸다.
선생님은 그런 친구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교실 문을 나섰고, 홀로 집에 가는 길에 내일 다시 청소를 깔끔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속상한 마음은 친구들이 혼나는 것으로 달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예절 교육 수업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른손이 왼손을 덮는 공수 자세를 배웠다. 그친 눈 대신 설이 오면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집안 어른께 인사하고 절을 했다. 받은 세뱃돈은 차곡차곡 봉투에 넣어 엄마에게 건넸다. 여자아이는 자고로 효를 깨달아 얌전하고 예의가 발라야 했으며, 욕심을 거둬야 했다.
살면서 딱 한 번 의사 표현을 감정적으로 크게 한 적이 있다. 열 살 때쯤 얼른 피아노 학원에 가라는 엄마의 말에 가기 싫다고 울면서 떼를 썼다. 그때 잠을 자고 있던 아빠가 벌떡 일어나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화를 냈고, 엄마는 아빠의 두 팔을 뒤에서 묶으며 진정하라고 했다. 처음 보는 아빠의 무서운 모습이었다. 방구석 모퉁이에서 쪼그려 앉아 서럽게 울던 나는 정신을 차려 보니 학원 건물 안 화장실이었고, 세면대 위 거울에 비친 작은 눈망울에는 투명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침 화장실로 들어오던 학원 선생님이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고, 생채기 하나 없는 손바닥을 내밀며 오다가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성숙한 여자아이는 조용하되, 또 묵묵해야 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후 아빠와 살게 되었을 때는 아빠에게 엄마랑 같이 살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 서로가 헤어지게 되었다는 어른들의 이별을 알게 된 날, 자는 내 곁으로 와 숨죽여 울던 아빠가 떠올라 차마 말로 내뱉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빠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슬퍼하는 것은 분명했다. 여린 아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아빠가 싫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단지 보살핌이 필요할 뿐이라고. 내가 운 만큼 아빠도 울었을 것이다.
한 번은 아무도 없는 집에 한 살 터울 동생과 함께 있었다. 늦은 저녁 깜빡 잠에 들었고, 비명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칼에 베여 피가 철철 나는 손을 부여잡고 우는 동생의 노란색 유치원복이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난생처음 본 선명한 피였지만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동생이 다친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다. 나는 어른 없는 집에서 동생을 돌봐야 하는 누나였다.
맞벌이와 이혼 가정에서 자란 흔한 딸의 이야기는 속에서 게워지지 않는 질문들을 토한다. 왜 교실을 어지럽히는 친구들을 혼내지 않느냐며 이의 제기를 하지 못했는지, 왜 아빠가 때릴까 봐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는지, 왜 한낱 초등학생이 아빠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왜 동생의 다친 손이 아닌 누나의 자격을 먼저 걱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일찍 철이 들면 애석하게도 나를 세상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을 잃는다. 십여 년이 지나서야 나조차도 도외시했던 애어른의 진짜 속내를 서서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애와 어른의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그 무엇도 아닌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순간들을 함께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