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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r 01. 2024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내 아픈 마음이 당신께 닿기를

내 아픈 마음이 당신께 닿기를


    "유정아, 난 네가 울었으면 좋겠다." 스스로가 조숙하다고 믿으며 조악한 감수성을 뽐내던 10대 때 어떤 날들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어렸을 적 슬픔에 관한 내 상상력의 한계는 사랑하고 간절한 누군가와의 영원한 작별까지였고, 그러니 이 영화만큼 슬픈 작품이 없었다. 작중 유정의 외삼촌은 유정에게 울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세상을 다 안다고 믿었지만, 세상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다 알 수 없는 곳이라는 평범한 진실조차 모르던 그때의 나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모든 대사를 이해하지는 못했고, 특히, 저 '울었으면 좋겠다'의 의미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웃기를 바라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울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지. 그땐 핏기 없는 메마른 슬픔이 고이고 고이다 터져 나오는 게 울음임을 알지 못했다. 끔찍한 슬픔에 잠식당한다면 오히려 눈물이 나오지 않음을, 다행히 그 나이에는 알지 못했다. 


    온갖 조숙한 척을 하던 10대 소년은 '조숙'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나이의 청년이 되었다. 부랴부랴 벅차게 읽어낸 세상엔 참 아픈 일들일 많았다. 눈물과도 조금은 더 친해졌다. 자주 만나서 좋을 거라고는 없는 이 친구와 어쩔 때는 매일같이 조우하기도 했다. '치유'라는 말이 내게도 필요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약인 건지 아님 그냥 시간이 흘러 무뎌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치유의 시간'은 금방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조금은 앓고 있는 중이다.


    SF 영화 <어나더 어스>에서의 상상력을 한 번 그대로 옮겨보자. 저 먼 곳에 지구와 똑같은 세계가 하나 더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어나더 어스>에서는 깨진 거울로서 평행 세계가 약간은 달리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단 하나의 금도 그이지 않는 거울처럼 완벽히 똑같은 세상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제가 조금 다르다. 그곳에서의 나는 당연히 지금까지의 나와 똑같은 삶을 살아냈을 테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세계의 나와 여기서의 내가 만날 기회가 생긴다. 똑같은 삶을 살아온 우리는 반가운 포옹을 나눈다. 나와 단 하나의 오차도 없는 삶의 궤적을 밟으며 살아온 '나 자신'이다. 얼마나 꿈꿔온 순간인가. '나'와 같은 삶을 살았으니,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일 테다. 넬의 노래 '치유'에는 '나를 갈라 내 안에 너를 들여놓고 싶은데/그래서 왜 이렇게 둘 수밖에 없는 건지 보여주고 싶은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아예 '나'를 가르지 않아도 되는 상대방이, 내게 수고했다며 진심 어린 따뜻함을 건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나는 완벽한 위로를 받지는 못할 것 같다. 이럴 일이 없기 때문에 증명은 요원할 테지만, 최소한 나의 사고실험으로는 '또 다른 나'로부터의 위로도 나를 완전히 감싸지는 못할 테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일 텐데도 말이다. 나는 늘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몇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남이 될 수 없고, 남 역시 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두 개체가 만나도, 그 안에서는 허탈함과 공허함이 먼저 느껴질 것 같다.

    어쩌면 위로에 필요한 건, 이해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물리적인 걸음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신적인 성장의 여정을 같이 나눈 사람으로부터도 온전히 위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드는 이유일 수도 있다. 삶이 너무 괴롭고 어려울 때,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무엇이 나를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살면서 그나마의 큰 위로를 받았을 때는 '눈물'이 흘렀던 것 같다. 어떤 영화 대사로, '지나간 일들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자'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썩 동의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일들이니까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는 것이다. 지난 일들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는 게 어떻고, 그렇다면 새로운 눈물은 오직 새로이 찾아올 두려움들에만 흘려질 자격이 있는 건가. 지나간 일들에 남아 넘치는 눈물을 좀 흘리는 것쯤은, 최소한 그만큼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의 '울었으면 좋겠다'라는, 어쩌면 마음을 좀 내려놓고 충분히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나는 가진 게 많지 않지만, 눈물 정도는 사치를 부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라고 눈물은 계속 만들어진다. 울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이왕이면 펑펑 울고 싶다. 세상 욕도 하고, 못나게 다른 사람 흉도 보며, 모든 눈물을 다 쏟아낼 정도로 울고 싶다. 그래야 너무도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릴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얼른 그치라는 타박 대신 나의 눈물을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체감하는 요즘이기도 하다.


  슬픔은 종종 내 마음의 문을 두들긴다. 내 마음을 지키는 나약한 병졸들은 언제나 슬픔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슬픔은 그렇게 굳게 닫힌 문을 박차듯이 활짝 열고 찾아오며 홍수처럼 밀려 들어온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있다. 힘든 시기에 조금은 더 벅차게 슬픈 시기를 보내는 누군가도 있다. 완전한 이해도, 완벽한 위로로 이어지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해와 위로가 무관하지는 않지만 정비례하지도 않다. 나는 늘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기에, 섣부르게 남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거대한 오해의 시작이자 때로는 폭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한 사람을 이해한다고 온전한 위로를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위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되지 않는 소리로도 한 사람을 안아주려고 애쓰는 그 마음 자체이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든다. 누군가의 울음을 질책하지 않고, 충분히 긴 시간을 기다려주며 말없이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이런 따뜻한 마음이, 삶 전체를 관통하여 이해해 보려는 고마운 시도보다도 더 사려깊고 값진 노력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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