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일 동안 해냈던 여행의 날들
인생이 시시했던 적은 없으나, 쉽지 않은 인생이라고 늘 유의미했던 시간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굉장히 무탈한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보겠냐고 물어보면 당장 아니라고 단정 짓기 힘들 것 같은 날들도 존재했다. 인생이 가련하고 처량했지만 무엇보다 지나치게 볼품없어 보이기도 하여 괴로웠다. 삶을 지탱하는 건 추억과 희망이라고 언젠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대단히 좋은 날들만 우리 앞에 펼쳐질 거라는 막연한 신뢰가 희망이 정의일 순 없다. 그래도 지난날의 일부는 떠올릴 추억이 됐으니, 지금의 순간들도 먼 훗날에는 나를 지탱하는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경험적 믿음이 희망의 요체다. 삶을 놓아버리거나 버리지 못하게 아깝게 만들고 싶었고, 추억을 만들어야겠다고 어렴풋이 다짐했다. 그러나 되는대로 살아오며 후회의 순간만 많이 만들었던 나는 이에 능숙할 수 없었다. 내 지난날을 저주했기에 내가 아파야 했다. 현실을 살아가며 나를 혐오하지 않았던 시간이 드물었다. 살아야만 하는 세상 안에서 나를 위한 추억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에 회의적이었다. 살아내야만 하는 세상이 아닌 곳으로의 여행을 결심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실 이런 굳은 심지와 굳건한 논리가 당시부터 뚜렷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의 모든 결정들이 판결문과 같은 촘촘한 논리들로 빼곡히 이루어진 건 아니다. 어쩌면 헐겁고 아마도 큰 뜻과는 무관했을 이유들로 나는 그해 긴 여행을 떠났다.
199일의 정말로 긴 여행이었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어쩌면 다신 없을 아름다운 날들로 이 여행이 남을 것임을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나 별다른 탄탄한 논리로 이루어진 추론은 아니었지만, 현재까지 이때의 199일만큼 유의미하게 아름다운 날들은 내게 없었다. 여행은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어, 아일랜드와 북유럽 그리고 동유럽을 차례로 찍은 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아프리카로 넘어갔다가 네팔에서 마무리되었다. 당시에 느끼기에 고단함은 있었어도 불가능해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난 지금 와서 다시 그런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 물어보면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여행의 매 순간이 좋을 순 없다. 여행은 기본적으로 일상으로부터의 괴리다. 현실의 괴로움뿐만 아니라 익숙한 편리함부터도 함께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여행의 본질은 관성과의 '굳이'다. 여행을 하며 우린 '굳이' 있어야만 하는 곳을 떠나 있지 않아도 됐을 곳에서 인생의 일부를 소비한다. 좋아하는 밴드 넬의 '청춘연가'라는 음악에는, '시간을 날 어른이 되게 했지만, 그만큼 더 바보로 만든 것 같아'라는 구절이 있다. 그때는 너무도 쉽게 했던 여행에 이제는 멈칫거리게 되니, 어쩌면 나는 현실 안에서 어른이 되며 더 무지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진 게 많지는 없지만 지켜야 할 것들은 많아졌고, 너무 많은 걸 버텨내느라 여행에서마저 무언가를 감당하기에는 벅참을 쉽게 느끼게 됐다. 여행을 마치며 그 시간이 '다신 없을 아름다운 날들'일 것 같다고 느꼈던 건, 어쩌면 나도 변할지도 모르겠다는 본능적 인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변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변함'은 상태의 변경을 의미하는 가치중립적인 단어다. 어떤 측면에서 나는 자랐고, 다른 측면에서는 겁을 잔뜩 내게 되었으며, 나의 현실에도 꽤나 큰 변화들이 있었다. 이 모두를 총칭할 수 있는 건 '변함' 외에는 없다. 최근에 몇 번 다시 여행을 다녀왔지만, 변해버린 내가 그때의 여행을 재연할 수는 없었다. 직장을 가지게 되며 어린 시절 여행 때 그토록 바라던 '고작 몇 푼' 정도는 벌 수 있게 되었고, 간사하게도 그때와 같은 수고로움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게 된 요즘이다. 미친듯한 고생에만 여행의 낭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은 가능하면 고생을 덜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도미토리가 힘들고, 아프리카에서 50일 넘게 했던 캠핑 여행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9일의 여행은 내게 있어 정말 '다신 없을 아름다운 날들'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수 있던 사람'이었던 게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울 때가 있다. 그 199일의 추억이 지금 내게 얼마나 두고두고 꺼내보는 선물 같은 시간이 되었는지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내가 그나마 잘하는 게 있다면 자기 객관화다. 얼마나 현실을 투정하고 남의 탓을 잘하는지를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 내가 그 시간에는 기꺼이 여행의 날들을 즐겼던 게 뿌듯함 이상으로 내게 감사하다. 그럴 수 있던 사람이었을 때, 그럴 수 있어야만 했던 여행을 떠나 참 다행이었다. 생각날 때마다 뒤적일 삶의 한 페이지가 있다는 건, 세상살이에 능숙하지 못한 내게 실망할 때마다 나를 다독여줄 큰 위안이다. 미약한 삶의 시간으로 사낸 귀한 날들이었다.
삶이 여행이라는 레토릭 이상으로 그 여행의 날들은 내게 있어서 삶 그 자체였다. 언젠가는 돌아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언제 돌아올지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않은 채로 떠났다. 끝남을 전제로 살아가지만 그 시점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태어나는 인생과 시작부터 퍽 닮아있던 시간이었다. 게으를 때도 있었고 때론 한낮이 되도록 빈둥거린 적도 많았지만, 여행을 즐기는 데 나는 충실한 편이었다. 세상을 가장 의미 있게 살다 간 사람에게도 단 조금의 낭비가 있을 수 없다. 비효율과 효율은 나쁘고 좋음으로 명확히 나뉘는 게 아니라 되려 보완재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또한 혼자서 살아내야 하는 게 삶이라는 게, 혼자 떠난 여행과도 잘 어울렸다. 여러모로 삶 같은 여행이었고 여행 같은 삶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인생을 여행에 빗대게 되었고, 그건 단순한 문학적 수사 이상으로 경험적인 진술이다. 내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건 다 여행의 날들이 즐겁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걷거나 아프리카에서 내내 텐트 생활을 하며, 권태와 불편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 특히 이제는 변해버린 나는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중이다. 지금 내가 견디는 현실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그때보다 아주 많이 숨통이 트인 건 아니다. 그러나 때론 아프고 괴로운 순간들도 여행 중의 괴로움과 힘듦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최소한 이 모든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다행스런 결론에 가끔 이르게 된다. 고작 이거,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 '고작' 하나가 없어서 발생되는 통증이 삶엔 지나치게 많다.
그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던 199일의 여행이었다. 그럴 수 있었기에, 어떻게든 살아는 갈 수 있는 지금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다녀왔다고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팔자가 고쳐지진 않았으나, 하나 분명한 건 여행의 기억이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모든 기억을 잃어도 그때의 감정과 기억은 생생하기를 바란다. 돌아오지 않은 시간을 그리워하는 건, 부질없는 추억 행위가 아니라 잊지는 않겠다는 절실함의 발로다. 나를 살게 하는 그 시간이 쉽게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럴 수 없겠지만 그래도 요행으로라도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인한 마모가 덜하기를 소원한다. 내 아픈 기억들은 물론이고 좋았던 몇 안 되는 순간 일부도 기꺼이 시간의 집어삼킴에 내어줄 수 있으니, 부디 삶이 이 기억은 가장 나중에 닳게 하기를 소망한다.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을 걸 알지만, 그만큼 내게는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지난날을 굳이 기억하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시간이 흔치 않게 선사하는 귀중한 선물이다. 그 귀한 선물을 나는 아끼고 또 아낄 테다. 내가 미워질 때마다, 내가 그럴 수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선물도 없었을 거라며 나서서 나를 변호할 것이다. 너무 오래 나를 꾸짖어만 왔다. 책망과 채근이 전혀 마땅하지 않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참작할 거리가 아예 없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단 이런 소중한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는가. 긴 여행을 다녀왔으니 뭐든 할 수 있겠다고 책임감 없는 낙관을 가지지는 않는다. 다만, 긴 여행을 잘 다녀올 정도로 괜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는 작은 긍정 정도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199일 동안 해냈던 여행은 이미 몇 년 전 끝이 났다. 하지만 그 후일담으로서의 삶은 진행 중이며, 그 소중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살아갈 수 있어 지난날에게 '영광'이라고 하고 싶다. 내 선택과 결정을 스스로 온전히 존중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럴 수 있는, 그럴 수 있던 시간이 내게도 있어, 정말 큰 기쁨이고 다행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그 여행을 정의 내리면, '다신 없을 아름다운 날들'이자 '여전히 삶을 비추는 따스한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