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간 바위에 새긴 눈물
며칠전 부평으로 외출하여 고(故) 조호정 여사(1928~2022)의 유고작 출판기념회에 다녀 왔다. 조호정 여사는 작년 10월에 작고하였다. 늦게나마 고인이 쓴 책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이 출판되었다. 필자는 몇 년 전 『청소년이 만나는 죽산 조봉암』을 집필한 인연이 있어 그곳에 가야 했다.
조호정은 죽산 조봉암의 맏딸이다. 그녀는 죽기 직전 자신의 아버님과 관련한 자신의 삶을 책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부녀의 삶은 동지이자 비서로 사적인 역사를 넘어 공적인 역사와 관련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성작가에게 수기를 건네준 후 몇차례 구술을 하고 원고를 검토했다. 엄밀히 말하면 구성 작가와의 공동작업이 이 책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직업적인 예술가만 예술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이야말로 뿌린 대로 거두는 진정한 예술이 아니겠는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고난의 삶을 사나 결국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둔다.
조호정은 1959년 7월의 마지막 날,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사법살인을 당한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다. 그녀의 나이 31살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딸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서이자 동지이자 친구였다고 아버지인 죽산을 회고한다. 부녀지간은 기질이 같았다. 둘 다 성정이 호방하고 털털하고 대범해서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그녀는 결혼 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살았는데 집 앞의 언덕에 너럭바위가 있었다. 바위는 묵묵히 비바람과 폭풍우를 견디며 모진 세월을 보냈다. 60년 동안이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그녀는 바위를 보며 아버지를 생각하고 부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수기를 적었다. 억울한 죽음 앞에 신원(伸冤)에의 간절한 기도와 해원(解冤)은 자식으로서 그녀의 숙명이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조호정 여사의 책을 통해 죽산의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죽산은 일제하에 3번의 옥살이(9년의 감옥살이)를 한 혁명가였지만 해방 후에는 대중정치가로 나섰다. 그는 제헌의원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보탰다.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입안했지만, 곧 이승만의 정적이 되었다. 그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국보법 위반으로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죽산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조 여사의 회고를 통해 알 수 있으니 소감이 없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모든 인간의 삶은 예술이다. 예술은 죽고 나서야 제대로 평가를 받는 것 아닌가. 이에 죽산의 인간적인 모습을 몇 자 적어 본다.
가부장제 사회였던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남녀가 따로 밥상을 받고 반찬 또한 따로 차려졌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죽산이 밥상을 받았는데 상에는 보쌈김치가 올라 있었다. 죽산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따로 상을 받아 식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보고 “왜 내상에 있는 반찬이 없어. 똑같이 놓고 먹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이 놓고 먹는 것이 그의 정신이었던 셈이다. 그의 이런 자세는 경제민주화를 위한 진보 정치로 연결되었다.
또한 죽산이 영화를 좋아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죽산은 일에 있어서는 합리적이고 엄정했지만, 속마음은 여리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녀는 자주 영화를 보곤 했는데 죽산을 영화를 볼 때마다 손수건을 꼭 챙겼다고 한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죽산은 ‘샤리’라는 개를 가족처럼 키웠고 이에 더해 거위, 다람쥐, 토끼를 집에서 키웠다고 하니 요즘으로 하면 동물 애호가인 셈이다. 말 못 하는 동물들이 아파할 때 같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늘의 축복임을 나이 든 사람은 안다.
죽산은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입담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의 모임엔 늘 술이 있게 마련이었다. 죽산은 술을 즐기는 애주가(愛酒家)이자 술이 센 호주가(好酒家)였다. 그는 아무리 마셔도 술 마신 티가 나지 않고 술자리에서 흐트러지거나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취한 것을 들키는 순간은 재채기였다. 에이취, 에이취하는 재채기를 한참 하였으니 상상하면 즐겁다. 그는 흥이 많아서 코샤크인의 춤을 추거나 명창 김소희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이토록 죽산은 따뜻하고 자상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죽산은 영화를 좋아했는데 그의 사위가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이봉래(1922~1998)였으니 사람의 인생에는 인연이 있는가 보다. 훗날 이봉래 감독은 장인을 기념하는 영화인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를 만들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검열로 심하게 가위질당해 누더기가 되어 버렸던 상흔이 있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제 죽산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를 제작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작가와 감독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역사는 기록하고 해석하는 자의 몫에 따라 시대를 이끌어 가지 않는가.
인천은 죽산이란 현대사의 큰 진보 정치가를 배출한 곳이다. 죽산은 이 땅에 무엇을 남겼는가. 진보 정치의 씨앗을 뿌렸다. 그가 외친 평화통일과 경제민주화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이제 큰 나무로 성장해야 한다. 60년간 바위에 새긴 눈물은 누가 닦아 주어야 할까. 2023. 3.2. 연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