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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창호 Aug 17. 2023

검여와 남전의 사제관계

검여 유희강과 남전 원중식

  

 

  예술작품이 꽃이라면 작가의 정신은 뿌리이다. 예술가는 정신과 혼을 담아 작품을 쓴다. 작품은 그의 또 다른 자아의 세계다. 모든 예술품은 자신과의 싸움, 연단과 훈련의 결과로 그 속에 그의 정신과 사상이 담겨 있다. 고난이 아닌 예술가의 삶은 없다. 고난을 뚫고서라야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인생에서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가 그 사람의 생을 결정한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는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1976))과 남전 원중식(南田 元仲植, 1941~2013)은 서예가로 그 둘은 사제지간이다. 검여의 나이 50에 스무살의 남전을 만났다. 검여가 남전보다 30년 위이니 어버지 뻘이라 할 수 있다. 남전은 검여에게 서예를 8년간 배웠고 스승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8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는 스승을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 또한 66세로 서거한 스승의 유작을 정리해 유작전을 열고 스승의 서예집을 출간해 주었으니 그 지극한 정성이 『슌킨이야기』(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 속의 스승과 제자를 연상케 한다.      

  미술사학자 최완수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30대 초반에 추사 선생 전시회를 열었는데 어느 날 반신불수가 된 노인을 태우고 온 택시가 있었지요. 어느 한 젊은이가 그 노인을 흴체어에 태우고 전시실로 들어오려 했는데 그만 계단 때문에 장애가 생겼지요. 그러자 내 또래의 그 젊은이가 노인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올라 전시실로 들어 왔지요. 저는 부자지간으로 알았어요. 1년 후에 또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들이 또 왔어요. 저는 그 젊은이가 참으로 보기 드문 효자라고 생각해 마음에 담아 두었어요. 나중에 통도사 극람암의 명정스님을 통해 그들이 사제지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들이 바로 검암과 남전이었지요.”간송미술관에서 평생을 몸담은 최완수 선생의 말이다. 그의 말에서 남전의 성품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남전은 제물포고 2학년때 경기도 중고생 미술대회에서 2등을 하면서 검여 선생을 알게 되었다. 인천시립박물관 주최의 경기도 학생미전이었는데 검여가 당시 박물관장으로 있었다. 그림에 대한 소질이 있던 남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게 된다. 

“박물관으로 찾아오게. 방학에 집중적으로 서예의 기초를 가르쳐 주겠네.”

지나가는 말로 들을 수 있으나 남전은 귀담아 듣고, 대학 입학 후 검여를 찾아 뵈었다.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그리고 스승에게서 붓잡는 법, 점 찍는 법, 가로 세로 획긋기를 한달 동안 매일 연습했다. “근본이 확립되면 도는 저절로 생긴다네. 천번 만번 연습하게. 피로서 글씨를 써야 하네. 잔재주 부리지 말고 성심을 다하게. 한 획이야말로 정신이고 그것이 전부일세. 자, 이제 육개월간 매일 영(永)자를 천 번 만 번 써보게.”

  남전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머리에 번개가 쳤고 몰입감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겨울방학이 올 때까지 한 획으로 전체를 담아 구극(究極)의 기운생동(氣運生動)을 담으려 했다. 이렇게 8년이 지났다. 어느 날 스승은 멀리 문상을 가서 며칠간 과로한 후 집에 돌아와 쓰러졌다. 오른쪽이 마비되었다. 서예가로서 생명이 끝난 것과 진배 없었다. 스승의 나이 57세였다.

“선생님, 서예는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오른손이 힘들면 왼손으로라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남전은 병든 아버지를 돌보듯 스승의 수족이 되어 극진히 모셨다. 검여는 다시 왼손으로 서예를 시작해 3년만에 좌수서(左手書) 작품으로 전시회를 연 불굴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 힘차고 강건한 그의 글씨는 떨리는 듯 이어지는 떨림의 세계였고 정신의 향연이었다. 그는 제자와 8년간 병고속에서 동고동락하면서 피로서 글씨를 썼다. 그것은 기술을 넘어선 도의 경지였으니 그의 글씨야말로 그의 정신이요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검여는 인천 시천동에서 출생했고 남전은 부개동에서 출생해 인천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특히 검여는 검여라는 호 이외에 시계(柴溪)라는 호를 즐겨 썼는데 시시내 마을이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천에서 서실을 열 때 서실 이름을 도곡(道谷)이라 하였는데 그가 도화동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향 사랑이 이와 같았다. 남전은 스승이 사용한 당호(堂號)인 소완재(蘇阮齋-소동파와 완당 김정희)를 살려 자신의 당호를 검완재(劍阮齋-검여와 완당)로 하였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할 만하다. 요즘 4월, 송암미술관에서 그 두분을 포함한 “인문학으로 읽는 한국서예사” 특강이 열린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들어 보길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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