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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창호 Aug 17. 2023

장봉도 푸른중학의 송두용

장봉도 푸른중학의 송두용

강화도와 영종도 사이의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에는 길다란 섬이 있다. 바로 장봉도이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는 송두용(1904~1986)은 장봉도 ‘푸른학원’의 중학교장이었다. 그의 제자들 보고 송두용 교장에 대해 말을 해달라고 하면 늘 하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가 늘 하던 말은 정직하라 였어요.” 교육의 목적은 지식 교육이 아니라 정직한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 이점에서 송두용을 주목해 글을 쓰고자 한다.

  송두용은 교육자이자 농촌운동가로 일제시기 서울 오류동에서 학교를 설립, 운영했고 직접 과수를 재배하였다. 송두용은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김교신, 함석헌과 함께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구로구 오류역 일대와 인천에 그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인천의 경우 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장봉도이다. 그는 말년을 장봉도에서 교육활동으로 보냈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1960~70년대 시절, 장봉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상급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건어장에서 날품팔이를 주로 하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인천의 중학교에 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고 학비가 싼 중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장봉섬 주민들에게 참으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장봉도 평촌 마을의 해안가를 앞장술이라 하는데 그곳에 푸른학원(중학교)을 설립한 사람은 노연태(1914~2004)였다. 그 때가 1967년이었다. 노연태는 송두용의 제자로 외항선 선장이었다. 그는 인천연안의 섬을 다니며 환자들에게 약을 가져다 주는 의료선교를 하고 있었다. 섬주민들의 염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노연태 선장은 섬주민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발벗고 나섰다. 

  학교이름을 ‘푸른’으로 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그것은 노연태의 부인이었던 권정님(1919~1958)의 교육정신에서 기인한다. 권정님은 이화여전 보육학과를 나와 함석헌, 송두용을 따랐는데 인천에서 유아교육에 전념했다. 그런데 나이 39세에 그만 안타깝게 요절하고 말았다. 그녀는 양심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이것을 그녀는 ‘푸른 마음’이라고 불렀다. 푸른 마음이라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노연태는 아내의 뜻을 기려 학교 이름을 ‘푸른학원’으로 정했던 것이다. 

  노연태가 3년간 학교를 운영하고 강화도에 들어가자 뒤를 이어 송두용이 1969년부터 ‘푸른학원’을 맡게 되었다. 당시 송두용은 65세로 신경쇠약증이 재발해 요양차 장봉도에 갔다가 제자인 노연태의 권유로 섬에 눌러 앉게 되었다. 학생들은 그를 교장선생님으로 부르지 않고 할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송두용은 교장으로서의 권위의식이 전혀 없었다. 송두용이 푸른학원을 떠맡게 되면서 학교가 안정되어 전체 학생수는 70여명에 달하였다. 필자가 조사해 보니 푸른학원 입학생은 장봉초등학교 졸업자의 47%에 달했고 매년 20여명이 입학했고 졸업했다. 학비가 쌌고 학비를 낼 수 없는 학생들은 그냥 가르쳤다. 홍성 풀무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도 주었다. 학교 재정 부담은 모두 송두용의 몫이었다. 

  푸른 학원의 교칙은 단 하나, 바로 정직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평촌마을 장술 앞 바다에서 할아버지의 조회가 시작되었다. 조회에서 말한 것은 “정직하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조회는 전혀 지루하지 않고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한다. 

  송두용은 교육청으로부터 학교가 공식인정 받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교장님, 왜 매년 심사에 떨어지는지 잘 알잖아요? 남들처럼 왜 하질 않아요?” 

편법과 뇌물을 쓰지 않고 정직하게 서류를 있는 그대로 작성하다보니 매년 떨어졌다고 한다. 공식허가 받는데 걸린 기간이 장장 5년이었다. 정직의 길은 고난 아닌 게 없다

  푸른학원은 16년간 운영되며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6년간 학교는 그 사명을 다하고 1982년 폐교되었다. 그후 학교는 푸른신협 건물로 활용되어 오다 이마저 문을 닫은지 10년이 넘었다. 현재 학교 건물과 사택이 앞장술 해안가에 덩그라니 남아 있다. 이제 그 역사적인 장소를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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