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삼일운동의 청년 지도자 조구원
며칠 전에 강화에 갔다. 그날은 삼일절 다음날이라 강화삼일만세운동기념비를 찾아 태극기를 들고 일행들과 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강화에 있는 죽산 조봉암의 유적을 둘러보는 날이었다. 강화 청년들의 삼일만세운동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봉암과 조구원이다. 죽산 조봉암은 널리 알려졌지만 조구원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여기서는 조구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구원은 건국훈장을 받았지만 2남3녀의 유족과 후손들이 훈장을 찾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친 강화 합일학교의 담벼락에 그의 이름 석자가 남아 있을 뿐이다.
조구원(1897~?)은 강화읍 신문리에서 1897년 출생하였다. 일본 경찰의 동향 보고 기록에 따르면 그의 집의 경제력이 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5천원 정도라 했으니 부농은 아니지만 중농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모가 키가 5척 3촌이고 긴 얼굴형에 하얀 피부를 한 것으로 보아 핸섬한 인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구인 죽산 조봉암의 집이 빈농이었던 것에 비해서는 넉넉한 집안이었다.
조구원은 성재 이동휘가 세운 보창학교에서 2년을 공부한 후 강화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해 1911년 졸업하였다. 강화에서 공부를 잘하고 집안이 넉넉하면 인천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대세여서 조구원은 인천상업학교에 진학하여 4회로 졸업하였다. 인천에서는 답동, 화평동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는 졸업 후 판임관 시험에 합격했다. 판임관은 지금으로 하면 하급공무원에 해당하는데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임관으로 근무한 기간은 삼개월 남짓에 불과하고 바로 경북 상주군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였다. 그가 왜 경북 상주로 갔는지는 모른다. 거기서 근무하다가 무슨 일인지 11개월만에 그만두고 고향인 강화로 돌아왔다. 그의 성격이 타지에서 생활하기보다는 고향에서 계몽운동에 종사하고픈 애국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이 넉넉해 가족의 생계를 부담하는 것에서 자유로왔던 것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식인 청년으로서 강화청년들과 힘을 합쳐 고향을 계몽시키고자 하였다.
조구원은 강화로 돌아와 잠두교회(현재의 강화중앙교회)의 엡웻청년회에서 계몽운동을 하였다. 엡웻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의 영국 고장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감리교회가 있는 곳의 청년회는 모두 엡웻청년회였다. 잠두교회엡웻청년회는 강화에서 애국과 계몽운동의 중심지였다.
강화 3.1운동은 3월 18일에 일어났는데 이때 유봉진 등 지도자들이 투옥되어 제2의 만세운동은 청년들의 몫이 되었다. 청년들은 강화를 비롯한 인천 연안의 섬에서 밤에 일제히 횃불을 드는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때 가장 앞장선 청년이 바로 조구원이었다. 이는 당시의 신문 기사에 조구원이 맨 앞에 등장하는 것과 3.1운동으로 투옥된 후 재판을 받은 판결문에서도 조구원이 이름이 맨 앞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제 역시 주동자로 여긴 듯하다.
그가 재판받은 판결문을 보자. “1919년 3월 20일경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신문리에서 조구원(趙龜元)은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불응하면 목을 베어 죽이거나 방화할 것이다.'는 내용의 문서를 자필로 작성하여 강화경찰서 경부 이해용(李海用)에게 우송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편결문을 보면 당시 조구원은 신문리 132번지에 살며, 예수교학교 교사 겸 매일신보 기자로 되어 있고, 기독교도라 기록하고 있다. 강화삼일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깨어있는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였다. 그가 재직한 기독교 학교는 잠두교회 아래에 있는 합일학교를 말하는 것이다. 합일학교는 잠두교회에서 만든 학교인 잠두의숙에서 출발하는데 교명을 합일로 바꾸었다. 단결하여 합쳐 하나가 되자는 것이 ‘합일(合一)’의 정신이다. 강화 기독교인의 특징은 ‘일(一)’자를 돌림자로 쓰는 것으로 이는 합일의 정신과 상통한다.
빈농의 아들인 죽산 조봉암이 1년의 옥살이를 한 것에 비해 조구원은 태형 90대를 맞고 풀려났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의 집안에서 모종의 힘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3.1운동 후 일경의 감시를 받아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는 없었다. 다만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날 때 강화지역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7년 동아일보 강화 주재 기자로 일한 것으로 보아 강화에서 온건한 방식의 실력양성운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요시찰 인물로 찍혀 일경은 그의 동향을 주기적으로 보고하였는데 일경의 보고에는 “공산주의에 찬동하여 그것을 선전하는 경향이 있고, 동시에 배일사상을 가지고 기회를 얻어 독립운동을 하고자 몰래 타인을 선동할 위험이 있음.”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봉암을 비롯한 강화 친구들이 타지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한 것에 기인한다고 보인다. 그는 1928년 죽은 것으로 국가보훈처는 기록하고 있으나 1930년 강화 대홍수에 수재의연금을 낸 것으로 되어 있어 언제 죽었는지는 불확실하다. 2015년 7월 국가보훈처는 그에게 유족이 없어 훈장을 수여할 수 없는 독립유공자 목록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의 유족들이 살아 있어 훈장을 수령해 가길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