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은수가 처음 대화 라는 걸 하게 된 어느 날이다. 교수님이 내신 전공 과제는 반드시 참고도서를 봐야하는 거였는데 은수도 일찌감치 과제때문에 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중이었다. 도서관에 과제 관련 참고도서가 몇권 안됬기 때문에 그 책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붙었다. 은수도 점심을 일찌감치 먹고 그 날은 종일 도서관에 박혀 있기로 작정했다. 한 발 늦었는지 대출해야하는 참고도서는 이미 다 사라졌다. 그럼 어쩐다. 은수는 당장 책을 살 수는 없으니 저자의 다른 책들을 뒤져보자 싶었다.
같은 층에는 은수 동기들이 여럿 흩어져 있다. 책을 확보한 동기는 없어 보인다. 대출한 책을 복사하자, 빌려보자 하는 제안이 귀찮을테니 도서관 대출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는 책을 가방에 잘 넣어 이미 귀가했을거다. 동기들을 위해서 제본하라고 잠시 빌려 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때만큼은 우린 모두 경쟁자이다.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열람실 통창으로 노을이 비쳐들어오려고 한다.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무엇엔가 집중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노을을 마주하는 순간의 희열이 있다. 자신이 발휘한 고도의 집중력에 대한 감탄도 있고, 찬란한 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대학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삶에 대한 순간적인 아련함도 있다.
그 희미한 노을풍경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동기도 아니고 선배도 아닌 그의 실루엣이 보인다. 뭐라고 정의내려야 하나. 같이 입학한게 아니니 동기는 아니고, 윗학번도 아니니 선배도 아니고. 선배동기? 동기선배? 아무튼 한 눈에 알아보아지는 걸 보니 은수는 그를 선배 쪽보다는 동기 쪽으로, 좀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 그것은 단순한 익숙함에 불과하지만, 노을지는 풍경에서는 감정이 풍부해기도 하니 그 순간에는 친근함으로 해두자.
멀리서 보이는데도, 그가 이 책 저 책을 들었다 놨다, 책을 펼쳐서 거칠게 책장을 앞뒤로 넘겼다 되돌렸다 하는 폼이, 그가 아직 과제를 위한 적당한 책을 찾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상당히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동기들과 달리 1, 2학년의 기간동안 전공 기초를 다지지 못한 그의 지적 경험의 절대적인 부족이 지금 그가 허덕이는 불안감의 원인이라는 것을 은수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마도 과제를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에 닿으니 짠하게 느껴진다.
"도와드릴까요?
"아..그래주면 고맙죠."
"교수님이 말씀하신 책은 이미 이 도서관에는 없어요. 아시죠? 그러니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제 생각에는 그 저자의 비슷한 책이 여러개가 있을 거에요. 열람실 안쪽으로 가시면 서고 320번대에 저자의 다른 책이 있어요. 그거 참고하시면 괜찮을 거 같아요."
"아..고마워요. 일단 찾아 볼게요."
"네. 과제 잘 하세요."
"저..그런데 내 이름 알아요?"
"아니오. 몰라요"
"이름도 모르는데 도와줘요?"
"전공과목 시간에 여러번 봤으니까요. 청강하시는 분이거나 편입생이거나 둘 중에 하나 아니신가요?"
"맞아요. 편입했어요. 최기형이에요.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네..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학교에서, 아는 것 하나 없는 전공과목을 따라가느라 버거웠을 그는 은수가 고마웠을 거다. 그러니 앞으로도 쭉 도움을 받으려면 친하게 지내는게 좋겠지. 당연히 그런 마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