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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Nov 06. 2024

힘을 뺄 줄 아는 사람이 좋다

갱년기 인사이드아웃 : 불안

중심을 잘 잡는 사람을 좋아한다.

중심을 잡기 위해 힘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힘을 뺄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 것처럼 힘을 빼고 누울 줄 알아야 다시 일어선다. 바람 따라 나를 눕힐 수 있는 유연성이 쉽지는 않다. 바람을 감지하면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힘을 빼는 일엔 각성이 필요하다. 살다 보니 저절로 알아져서 어느 순간 힘을 뺄 줄도 알게 되겠지만, 바람의 강도에 따라 얼마나 누워야 하는지를 조절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스무 살의 바람과 서른 살의 바람이 거세었다. 저절로 알아진 것이 없어 눕지 않고 버텼다. 버틸만했다. 이 정도를 견디었으니 어떤 바람을 맞아도 끄떡없으리라 믿었다. 작은 구멍도 꼼꼼하게 메웠으니 바람이 불어올 틈이 없어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행여 작은 틈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해도 꼿꼿하게 버티고 당당하게 견디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바람은 어디서나 불어서 막을 수 없음을 언젠가부터 알아 버렸다.


복닥거리는 일들은 반복된다. 남편은 이직을 알아봐야 하는 나이인데 준비해 보겠다고 말만 하고 하지 않는다. 폰만 들여다보며 유튜브를 보고 히죽이다가 아내의 눈초리가 매워지면 슬쩍 자리를 피한다. 월급이 줄어서 본인 용돈 정도 쓸까 말까. 이렇게 지내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할 듯싶어 불안한데 이직 준비는 말로 다 한다.


해외 연수를 위해 어학 공부를 하겠다고 휴학을 한 아들은 하루종일 게임만 한다. 도대체 왜 휴학을 했는지 모르겠다. 밤새 게임을 하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 나서 냉장고 문만 열였다 닫았다 하다가, "너는 대체..." 말을 꺼내면 까치집을 하고 슬리퍼를 발에 끼우고 슬쩍 사라진다. 그리고는 밤새 소식이라곤 없다. 어학 공부가 아니라 동네 피방 죽돌이를 하기 위해 휴학을 했나 보다.


친정엄마는 여기저기 아프다고 매일 하소연이다.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시면 피곤해서 힘들고,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은 마음에 수면제를 드시면 그다음 날 멍하고 속이 쓰려서 힘드시단다. 수면제를 드시지 말아 보시라고 하면 '너희들은 잠 못 자는 고통을 모른다.'라고 하시고, 그럼 어쩌겠냐고 수면제를 드시라고 하면 '속 쓰린 아픔을 어찌 알겠냐며 푸념을 하신다. 하루종일 반복되는 하소연에 짜증이 솟구쳐서 '통증은 혼자 겪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  엄마의 고통을 이해 못 하는 나쁜 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쌓이는 경력이 플러스가 아니고 마이너스다. 나이가 들었다고 알아주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일을 구하지 못한다.  수입은 해마다 깎이는데 생활비는 고정이다. 수입에 맞춰서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돈 때문에 걱정하기 시작하면 스트레스로 몸이 아파 병원비가 더 나갈 것 같다. 돈에 맞춰 살기보다 마음에 맞춰 사는 게 차라리 경제적이다.  절약 코스프레를 위해 주말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서 버텨보지만,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자괴감에 온라인 쇼핑에서 옷을 주 한다. 나가나 안 나가나. 그 돈이 그 돈이다. 스트레스로 아파서 병원비 나가느니 옷 값으로 나가는 게 낫다며 기분 전환을 한다.


이직 준비는 남편의 몫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자격증 밖에 없다. 쉽지 않은 자격증이라 공부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데,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을 하면서  학업까지 병행하려니 몸이 힘들다. 결국 몸에 병이 나 버린다. 일하며 공부한답시고 몸을 혹사했다. 약을 먹기 시작하니 속이 쓰리고, 속이 쓰리니 음식을 허겁지겁 먹게 되어 살이 찐다. 인생은 악순환.


꼿꼿하게 버티고 싶어도 버틸 힘이 없다. 시원하게 해결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번 달은 지출이 많아서 통장의 잔고가 간당간당하다. 어떤 날은 0원을 기록하기도 한다. 추석은 다가오는데 돈 나올 구멍이 없다. 위장병으로 속만 쓰린 게 아니라 마음이 더 쓰리다. 딱 그 시점에 빌려줬다가 떼인 돈을 받는 것처럼 돈이 제 발로 찾아든다. 여유 자금이 생기면 맞춤처럼, 그만큼의 돈 나갈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없으면 또 알아서 그만큼 들어온다. 이번에도 추석에 쓸 비용만큼의 돈이 제 발로 찾아왔다.


하루종일 아프다고 끙끙대는 엄마 옆을 지키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2-3일에 한 번 가서 점심 차려 드리는 딸과 겪어야 하는 온도가 다를 것이다. 딸은 엄마가 낳아서 키운 핏줄이니, 키워주신 빚 갚는 심정으로 잠깐 싫은 소리 들으며 견디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내 엄마니까. 엄밀하게 말해 아버지는 피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공명해줄 수 없는 타인의 아픔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옆사람의 고통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가 엄마만큼 안쓰럽다. 차라리 딸이라서 다행이다.


종일 게임하고 늦잠 자는 녀석, 건강하니까 하는 것이다. 밤새 게임은 아무나 하나. 대학 생활 2년을 바쁘게 했으니 잠시 쉬는 것도 괜찮겠다. 주변에서 공부 잘했던 아들 딸들도 재수하고 삼수하는 집들이 많다. 돈은 돈대로 나가는데, 성적에 비해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아서 속을 끓인다. 저러다가 고3 때보다 못한 학교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동네 피방에서 아르바이트비 다 쓰며, 매출 1위를 올리고 있을 아들 얼굴을 떠올린다. 현역으로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을 가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아직은 경제활동을 하면서 꼬박꼬박 돈을 벌어오는 남편,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 스스로 관리도 잘하는 편이다. 차에 대한 욕망은 늙지 않는지, 차 할부가 끝나자마자 새 차로 갈아타고 싶어서 들썩거리는 모습은 기도 안 차지만,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복이다. 평생 일해서 가족들 먹여 살릴 사주라고 했으니 믿어보려고 한다. 늙어서도 일할 팔자라니 다행이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힘을 길러왔던 시기는 지나가고 바람 따라 누워야만 하는 시즌이다. 지금 중심을 잘 잡는 것은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제 때에 잘 누워야 하는 일이다. 누워야만 하는 일이 찾아왔을 때 힘을 빼고 심장에게 '다행이다'를 말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중심이다.

중심을 잡기 위해오늘도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사람, '다행이다'를 웃으며 말하며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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