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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Oct 21. 2024

영화 보통의 가족 : 대한민국 부모의 현주소

영화 리뷰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평범해지면 보통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는 이미 우리의 논리가 된 '보통'을 과장된 사건으로 증명한다. 그래서 '보통의 가족'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 보통의 가족이라기보다 '대한민국 보통의 부모'라고 하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웰메이드 작품으로 소개된 영화, '보통의 가족'은 캐릭터의 변화를 지켜보며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러 놀라야 하는데 전혀 놀랍지 않다. 대한민국 부모가 어떤지 잘 알고 있기에.



아이의 입시와 미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들에게 자식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제거하는 일은 당연하다. 미묘한 심리를 잘 다룬 해외 작품들처럼 잘 짜인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놀랍다!'라고 하면 좋으련만,  현재의 온도와 정확하게 일치해서 오히려 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줄 알았어. 놀랍지 않은 걸.' 현실의 대한민국 부모라면 결말이 '답정너'처럼 전해진다.



학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교사들을 자살에 이르게도 하는 학교폭력. 학교폭력을 직접 경험해 본 사람들을 알 것이다. 상식적인 부모들에게 통하지 않는 상식이 있다면 '내 아이가 입을 피해'이다. 내 아이의 불이익 앞에서는 상식도 보통도 평범도 없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남의 아이의 피해는 상관없다. 싸움이 번져 판이 커져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 정답은 부모의 능력과 재력, 사회적 간판이다. 능력이 없으면 아무도 상대할 수 없는 '도라이' 일수록 승산이 높다. 상식적인 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들면 된다. 교육이나 도덕, 윤리적 관점은 소용없다. 내 아이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이유 불문 비도덕적인 일이고, 내 아이가 가해자로 몰릴 판이면 지독한 역반하장으로 우기면 된다. 여기에 윤리란 없다.



작고 사소한 학교폭력 문제에서 부모들이 선택하는 지점을 이해한다면 이 영화는 보통의 가족을 묘사한 보통의 가족 서사일 뿐이다. 제목에서 아이러니나 역설을 발견할 수 없다. 그만큼 흔한 일이다. 게다가 최고의 변호사와 의사 집안의 아이들이니 훨씬 사실적이다. 실제 학교폭력이나 아동학대가 소송으로 번지는 일은 엘리트 부모일수록 통계가 높다.



금수저가 낸 교통사고를 과실치사로 둔갑시키는 능력 있는 변호사 아버지가 자신의 딸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관점 변화는 생뚱맞다. 본인이 해온 일이 대체로 '금수저 괴물 변론'이었는데 왜 갑자기 딸에게만 윤리적인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해가 된다. 법망을 돈으로 피해서 살아가는 괴물들이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생명이 가장 소중한 윤리적인  의사 아버지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했던 극단적인 방법도 마찬가지다. 다른 영화라면 인물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관객으로서 심리적 이의를 제기했을 텐데, 대한민국 부모를 묘사하는 영화라서 괜찮다. 극단도 보편성이 될 수 있으므로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진리처럼 자신이 짠 그물에 본인이 걸려든다는 결말이 오히려 안정적으로 보인다.



좋은 대학에 합격해서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대한민국 가정의 '순리'를 간파한 아이들이 괴물로 자라는 일은 당연하다.  가정과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삶의 철학을 아이들은 과감하게 실행한다. 약자는 어차피 실패했으므로 거기에 약간의 폭력을 가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나의 가해는 범죄가 아니다. 죽을 놈을 죽였는데 그게 왜 죄인가. 새로운 '죄와 벌'의 가치가 그들의 논리 안에서 성립된다. 본심만 잘 숨기면 된다. 잘못한 척만 하면 된다. 괴물들에게 후회와 반성은 포장된 연기이자,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식일 뿐이다.



뻔한 영화라서 뼈아프다. 소수의 금수저에게 해당하는 특별한 이야기라면 뼈아프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에 조용히 스며 명확한 논리가 된 '괴물의 탄생'은  영화처럼 극대화된 사건이 아닐 뿐이다.  작건 크건, 우리의 잣대와 상식으로 작용하여 대한민국 부모를 조종하고 있다. 그 현실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일상으로 마주한 시간이 길다.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서울 시내 구석구석의 학교에서 종종 듣는 일들이다.  극단적인 사건 전개와 결말을 순화한다면.




대한민국 부모라면 마지막 결론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라며 흔들릴 것이다.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더라도 주인공과 같은 결론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 수도 있다. 내 아이의 문제라면 부모로서 그런 선택을 할 수있다며 주인공을 감싸고 싶기도 하다. 당장 대학을 가야 하는데 그 길을 막는다면 뭐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흔들리는 순간이 대한민국 부모의 현주소이다. 나에게도 질문을 던져 보게 된다. 나라면.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대한민국 부모로서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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