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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마테스 Feb 11. 2023

그래서 나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하였다.

2022.06.05 개인 SNS에 올린 글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서 열린 대수학 학회에 왔다. Algebra 2022 and Beyond라는 제목을 가진 이 학회는,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20년간 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오신 마이클 라슨 교수의 60번째 생신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수학자의 6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학회는 학계의 유구한 전통이다. (지금껏 기회가 닿지 않아, 실제로 참석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학회는 총 3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1명의 교수님들과 9명의 대학원생들의 발표로 이뤄져 있었다. 대부분의 발표자들은 라슨 교수님과 친분이 깊거나 그분의 지도 학생들이었던 반면, 나는 그와는 조금도 접점이 없는 대학원생이었다. 덕분에 발표를 준비하면서도 내가 여기서 발표를 해도 되나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첫째 날의 마지막 발표는 카이스트의 임보해 교수님께서 맡으셨다. 발표를 마치신 임교수님께선 진지한 학자의 분위기를 거두시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화제를 옮기셨다.


"지금까지 발표자로서 이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저는 메신저로 역할을 바꾸겠습니다."


그러고는 라슨 교수님의 지도 학생들에게 받아온 편지와 사진을 화면에 하나씩 띄우셨다. 이제는 베테랑 교수가 되신 분들서부터, 아직은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분들까지. 제 각기 다른 시대의 라슨 교수님을 기억하며 써 내려간 축하 편지를, 교수님께서는 꼼꼼히 그리고 찬찬히 읽어 내려가셨다. 이 자리의 유일한 이방인인 나는 그분께 방해가 되지 않을까 가장 뒷자리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은 무엇일까. 이제 막 학계에 데뷔를 치른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겠지.


사람은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정은 희로애락이란 분류에 얼추 잘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저들 중 하나로 분류되지 않는 감정도 있다. 아마 라슨 교수님께서 겪고 계신 저 심정이 그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그 사람의 시간을 살고, 그 사람의 생애를 뒤따라 밟지 않는 한 경험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다. 나는 저것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저 감정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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