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귀명창
판소리를 못하지만 듣고 감상하는 수준이 명창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한다. 귀가 명창이라는 뜻이다. 귀명창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의 능력 수준은 상대적이다. 어느 분야가 되었건 간에 뛰어난 사람은 다수 중에서 도드라진 한 명이거나 소수(少數)다. 긴 역사를 통하여 인류의 사표(師表)가 되는 성인(聖人)은 손으로 꼽는다. 인류의 삶에 크게 기여한 천재(天才)는 많지만, 인류 전체를 고려하면 천재는 극히 적은 수의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성인이나 천재가 아니다. 평범(平凡)한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청소년기에 열등감(劣等感)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급우를 부러워했다. 운동을 잘하는 친구를 시샘했다. 반대로 나에 비해 공부도 운동도 뒤지는 친구에 대해서는 우월감(優越感)을 느꼈다. 먼 훗날에야 평등심(平等心)의 관점에서 보면, 열등감과 우월감은 한 얼굴에 속한 두 개의 표정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개개인의 소질과 재능을 신장시키려는 수월성(秀越性) 교육은 모든 학습자에게 가능하다. 남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난 선천적 특성을 키워주려는 탁월성(卓越性) 교육은 소수에게만 가능하다. 뛰어난 선천적 특성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난 나는 애초에 탁월성 교육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 조상 탓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내게 주어진 평범한 능력과 신체 조건을 가지고 간신히 세상에 적응하였고 생존하였다. 지금보다 더 어려운 처지(處地)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에 감사하면서 살았다. 내가 가진 역량과 삶의 조건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주어진 것이었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은 간디나 김구 같은 위인을 본받으라고 했다. 노력하면 그런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 어떤 성직자들은 신도들에게 석가나 예수처럼 살라고 말한다. 마치 누구나 다 부처나 예수처럼 살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한다. 내가 노력하면 정말로 간디나 김구처럼 살 수 있을까? 석가나 예수처럼 살 수 있을까?
위인들을 존경할 수는 있으나 위인들처럼 살 수는 없다. 내 깜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나는 뒤늦게야 눈치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나를 벗어날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간디나 김구가 아닌 나였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세상을 산다는 것을. 내가 자각을 하건 못하건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것을. 역사적 차원에서는 위인이 나보다 앞서 태어나지만, 내 세상에서는 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위인이 내 세상을 찾아온다는 것을. 나의 의해 내 세상으로 초대받지 못한 위인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위인도 내가 내 세상으로 초대를 했을 경우에만 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내가 없으면 위인도 없다는 것을. 위인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기에 위인도 있다는 것을.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위인을 존경하되 숭배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내가 할 일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내 세상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위인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귀담아들으면 되었다. 그 이야기가 좋으면 즐겁게 듣고, 재미없으면 그를 내 세상에서 내보냈다. 설령 위인이라고 할지라도. 선택은 나의 권리이므로.
어차피 나는 나의 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위인이 내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하면,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만 들으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한 척할 필요가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어떤 위인이 내가 실천하기 어려운 행위를 하면, 그냥 존경만 하면 된다. 그를 본받아 실천할 수 있는 데까지만 실천하면 된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100m를 10초 안에 달릴 수 없다. 나는 달라이 라마처럼 살 수 없다.
나는 종종 바둑을 두거나 시청한다. 하수(下手)가 볼 수 있는 수(手)와 상수(上手)가 볼 수 있는 수는 다르다. 바둑을 더 깊게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상수들의 바둑을 구경한다. 하지만 프로 9단(段)과 나 사이는 거리가 멀다. 아니, 까마득하여 그들의 세계가 천상계처럼 느껴진다. 어디 바둑뿐이랴? 세상만사(世上萬事)에는 각각의 수준(水準)이 있다. 나는 내가 가진 작은 힘을 사용하여 현재의 수준을 조금이라도 더 확장해 보려고 시도한다. 왜냐고? 더 알면 더 즐겁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귀명창이 좋은 소리꾼을 낳는다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소리꾼이 있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내게는 명창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계기로 판소리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판소리를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명창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귀를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위인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할 일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귀를 만드는 것이다. 내 마음 세상은 그저 그런 소박한 세상이다. 하지만 위인들이 내 마음 세상에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을 내 세상으로 초대해야 한다. 비록 듣는 수준이 낮을지라도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을 때만 그들은 나의 위인이 될 수 있다.
나와 위인들의 만남. 나는 그들이 있어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느낀다. 나는 위인들을 만나서 즐겁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나를 만나서 즐거울 것이다. 위인들에게 나 같은 건 없어도 된다고? 그러면 그는 내게 더 이상 위인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나의 소박한 노력을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