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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Mar 22. 2024

숲길에서

24. 희망

  희망 없는 생명은 없다.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희망을 품고 산다. 절망 속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있다. 희망을 잃은 생명은 죽음에 가까이 가 있다.

  살면서 종종 희망을 잃는다. 병들었을 때, 문득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을 때, 악마 같은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으로 추락할 때 절망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절망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희망을 찾는다. 희망이 안 보이는데도 왜 그냥 죽으려고 하지 않을까? 온갖 궁리를 다하면서 그런 상황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칠까? 구원이 손길을 기다릴까?

  ‘맹목적(盲目的)인 삶에의 의지(意志)’는 어떤 이성적인 판단보다 앞선다. 우울한 기분이나 염세적(厭世的)인 생각도 ‘살고 싶다’는 충동을 넘어설 수 없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잘 살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얼굴이다. 

  생명체를 ‘살려는 충동을 가진 것’이라고 정의(定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산다’는 것은 생존을 지속(持續)한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떤 생명체가 생존충동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뜻이다.

  희망은 생존충동에서 발원(發源)한다. 생존에 유리한 상황을 유지 확장하거나,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서, 장차 도래(到來)할 상황을 과녁 삼아 나아가려 할 때, ‘아직 없지만 장차 있기를 원하는’ 목표를 향할 때 생기는 마음이 희망이다. 모든 생명은 희망을 갖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힘인 희망은 생명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특성이다. 희망은 보편적인 것이다. 절망(絶望) 자살(自殺) 자해(自害)는 희망의 변형된 양태이며 특이(特異)한 현상이다. 희망이 없는 생명은 병든 생명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초기에는 파괴적인 죽음본능(Thanatos)을 생존본능인 리비도(Livido)의 변형된 형태로 보다가, 후기에는 1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파괴하려는 죽음본능(Thanatos)을 사랑본능(Eros)과 다른 하나의 실체로 이해했다. 나는 타나토스를 리비도의 병든 양태로 본다. 프로이트의 초기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에게 있어 생존본능은 죽음본능보다 더 근원적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Zeus)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선각자)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후각자)에게 결혼 선물로 상자 하나를 주었다. 소위 판도라의 상자를 준 것이다. 그것을 열지 말라는 프로메테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에피메테우스의 아내 판도라(Pandora)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상자를 열었다. 그때 상자에서 가난 질병 노화 시기 증오 등이 나와 세상에 퍼졌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희망이 나왔다. 사람들은 불행 속에서도 가냘픈 희망에 매달려 죽지 않고 산다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다. 내가 생각할 때 이 신화는 희망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희망은 힘이 세다. 살아 숨 쉬는 한 희망은 다른 온갖 불행을 이겨낸다. 희망은 일상에서 늘 강력하게 작동한다. 희망이 꺾였을 때도 꺾인 그 자리에서 희망의 싹은 곧바로 자란다. 희망을 가질 힘마저 없을 때도 희망은 살아 있다.

  희망의 내용과 크기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희망이 가벼운 것일 수 있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간절하다. 상황이 변하면 희망도 변한다.

  희망은 늘 현재 상황과 관련된다. 현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희망은 망상(妄想)이며 진정한 희망이 아니다.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희망은 구체적인 전망(展望)을 갖는다. 일류야구 선수를 흉내 내는 선수와 현재 자신의 잘못된 타격자세를 알고 그것을 교정하려 하는 선수를 비교해 보자. 전자는 망상에 빠져있고, 후자는 희망을 갖고 있다.

  희망의 실현(實現)에는 실천(實踐)이 필요하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꿈을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창조해 낼 때 희망은 그 행위 속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다. 지금 여기에 발을 딛고 스스로 자신의 꿈을 향하여 한 걸음 내딛는 그곳에 희망은 동시에 존재한다.

  추락하여 절망할 때, 추락한 바로 그 지점을 잘 살펴보자. 충분히 절망해 보자.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보자.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낮아져 보자. 희망은 그 자리에서 싹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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