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 세상을 찾아온 아이
딸이 아기를 낳았다. 홀연히 한 아이가 내 세상을 찾아왔다.
출산 직후 분만실에서 딸과 사위는 갓난아기를 중앙에 두고 셋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너의 아빠고 엄마야.’
딸과 사위는 사진을 통해 자기들이 부모임을 아기에게 말해 주었다. 아기는 본능적인 동물적 감각으로 ‘말 없는 말’을 들었다. 아기는 말 없는 말을 듣고, 누가 자신의 엄마 아빠인지를 확인하고,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였다. 아기에게 세상은 안전한 곳이자 환영받는 곳이었다. 아기가 두 사람을 부모로 받아들인 덕분에 딸과 사위는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가족이 되었다.
분만실에서 안정을 취한 산모가 갓난아이를 안고 산부인과를 떠나 산후조리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와 아내는 갓난아이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된 나 그리고 할머니가 된 아내와 사돈댁은 포대기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기를 1층 대기실에서 5분 정도 볼 수 있었다. 만남의 시간이 짧았던 이유는 아기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의료진이 산모 외의 사람과 아기의 접촉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그 짧은 만남을 위하여 사돈댁은 세종에서 서울까지 새벽길을 달려왔다.
아기와 산모 모두 건강 상태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이었다. 임신과 출산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아기와 산모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았다. 임신 초기, 크기가 채 1cm도 안 된 태아(胎兒)의 심장박동을 초음파 영상으로 보고 듣던 감동의 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딸 부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해? 영재? 꽃미남?”
“아니요. 그저 건강한 아이면 돼요.”
딸 부부가 초심(初心)을 오래 유지하기를 원한다.
언제 보아도 아기는 신기하고 놀라운 존재이다.
‘1mm도 안 되는 한 개의 작은 점이 10달 사이에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자라다니!’
병원을 떠나기 직전에 나는 누군가에게 아기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 모습을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환영한다는 뜻을 담고 싶었다. 백일 때에도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가야, 우리는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라다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우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주변인을 결속하고 연대의 끈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가족들은 아기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아내는 산모에게 필요한 음식을 만들었다. 나는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하거나 운전을 하면서 아내를 거들었다. 딸과 사위는 당근 마켓을 통하여 이런저런 유아용품과 장난감을 조사하고 거래를 하였다. 모빌, 교구와 책, 장난감, 놀이 기구 등등. 나는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거래한 물건들을 사서 운반하였다. 거실과 방은 아기용품으로 채워졌다. 아기는 가족들 일상의 중심이 되었다.
신생아(생후 1개월 이내) 시기의 아기는 먹고 자기만 하는 것 같았다. 작고 작은 아기를 안고 있으면 조심스러웠다. 불면 날아가고 쥐면 바스러질 것 같다는 말이 실감 났다. 그러나 잘 자랐다. 먹는 만큼 자랐다.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하루하루가 다른 신생아 시기였다.
아기는 부모가 낳는다고 생각하지만, 부모를 통하여 아기 스스로 이 세상을 찾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기는 기르고 가르쳐야 될 대상이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아기를 통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아기는 귀한 손님이자 스승이다. 아기를 긴 여로(旅路)의 동반자로 예우해야 한다. 아기의 본성에 어울리는 양육을 할 때 아기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사돈댁이 아이 부모에게 당부하였다.
“아이를 키울 때는, 아빠처럼 키우지 말고, 엄마처럼도 키우지 말고, 꼭 그 아이처럼 키워야 한다.”
아기는 엄마아빠의 행운이고 축복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이자 의미다.
아이는 놀랍고 신비롭다. 우주의 장대한 전개와 생명의 드라마틱한 진화와 인간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작고 여린 한 아이에게 오롯이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오늘의 아기는 어제의 아기가 아니다. 늘 새롭다. 나는 아기가 어떤 세상을 사는지 잘 모른다. 그저 조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어디 아기만 놀랍고 신기한 존재인가? 어른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한때는 아기였다. 놀랍고 신비로운 존재였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누구나 지금 살고 있는 그대로 ‘놀랍고 신비로운 존재’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신의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거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왜 스스로 천박해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자신의 고귀함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자긍심을 잃고 비굴하게 사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왜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일까?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아기를 보고 있으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동시에 오고 간다. 우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문득 슬퍼진다. 때로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다양한 어려움을 상상해 본다. 아이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나는 조금씩 할아버지가 되어 간다. 아이를 꼬옥 껴안는다.
‘그래그래. 세상살이가 쉽지 않지.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야. 네 앞에 열린 세상이 멋진 세상이면 좋겠어.’
본디 삶은 무의미한 것인데, 아이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 갈까? 피할 수 없는 역경을 만나면 어떻게 버티고 이겨낼까? 씩씩하고 슬기롭게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어느 날 딸이 물었다.
“아빠, 아이를 돌보느라 아빠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괜찮아.”
치발기를 물고서 흘린 침을 닫아준 뒤, 자리에 눕혀있던 아이를 왼쪽 가슴께로 올려 안았다. 내가 아이를 돌보는 이 시간은 아이의 시간이자 내 시간이다. 아이와 내가 함께 하는 이 시간은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값싼 것도 아니다. 돈으로 계산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마음을 쓰는 대상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규정한다. 그 대상을 대하는 태도는 나의 존재 양상을 드러낸다. 나는 딸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아버지가 되었듯이, 손자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할아버지가 되어간다. 아이와 내가 함께 지내는 시간은 손자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는, 둘의 관계가 익어가는 소중한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자세는 바로 내 모습이다.
삶은 시간의 조화이자 시간 자체다. 내 삶이 지금 여기를 떠나 따로 어디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지내는 이 시간이 곧 내 인생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의 질(質)은 내 삶의 질이다.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을 시켜준다. 가게도 병원도 함께 간다. 내 세상을 찾아온 아이는 어느 순간 내 삶에 내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내 세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아이의 세상이 되어간다. 아이에게 나는 어떤 세상일까? 아이와 함께 하는 이런 시간은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다 한때다. 아이와 함께 좀 더 많은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아이가 더 자라면 함께 숲길을 걷고 싶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열린 푸른 하늘을 보고, 흐르는 구름을 구경하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에 온몸을 흠뻑 젖고 싶다. 아이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이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일 것이다. 아이가 어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늘 궁금해할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60여 년 전에 어찌 휴대폰이 일상이 된 세상을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아이의 미래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은 2024년. 아이는 아마 2100년을 넘겨서 살 것이다. 2050년대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2100년대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는가?
장차 아이가 교양 있는 지성인으로 자라기를, 주변인에게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해 주는 지식인이 되기를, 열린 눈과 맘으로 늙은 나를 이끌어주는 친절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