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떠나야 해서 조식을 먹지 못한다고 했더니 호텔 직원이 빵과 과일 이것저것을 싼 종이가방을 건네주는데 그 친절함에 활짝 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오래됐지만 고풍스러웠던, 아침이 너무 맛있었던, 오고 갈 때마다 친절하게 웃었던 직원들이 있어 마음이 따뜻했던 Moon Boutique Hotel과 작별인사를 하고 우린 택시를 타고 플로랑스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그동안 거의 매일 먹었던 크라상과 아메리카노로 아침을 해결하고 스위스 항공에 몸을 실었다. 매번 먹을 때마다 느꼈는데 유럽에서 먹는 크라상은 미국에서 먹는 크라상보다 훨씬 맛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에서 주는 쿠키나 땅콩대신 스위스 에어라인에서는 Thank you for flying SWISS라고 적힌 빨간 포장지에 싸인 초콜릿을 줬다. 빨간 포장지를 펼치니 스위스 항공 로로 십자가와 스위스 글자가 찍혀 있는 초콜릿이 나왔다. 초콜릿은 스위스 초콜릿이 제일 맛있다고 했는데, 역시 스위스의 달콤함을 입으로 녹이면서 스위스를 음미하고 있었다. 오전 9시 35분 출발한 비행기는 약 1시간 20분 후에 스위스 취리히 (Zurich)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의 숙소가 있는 인터라켄 까지는 기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었다. 미리 앱으로 예약해 두었던 SBB (Swiss Federal Railways) 스위스 기차를 타기 위해 공항 바로 옆에 위치한 스위스 기차역으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가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전광판에 보이는 시간이랑 우리 기차표 티켓의 시간이 맞지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있는 할머니들한테 인터라켄 서쪽 (Interlaken West) 가는 기차가 여기 오는 게 맞냐고 영어로 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여기서 타면 된다는 할머니들의 말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아들과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왠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싸한 불안함을 걷어낼 수가 없었다. 불안한 얼굴로 기차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중년의 남자분이 다가와서 도움이 필요하냐며 다가와서 내 기차 티켓을 보여달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아까부터 계속 노려보던 내 전화기 속 예매 티켓을 보여주니 이 역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예매하고자 했던 기차역은 취리히 (Zurich) 공항 기차역인데 실제로 내가 예매한 기차역은 취리히 (Zurich HB)라고 했다. HB가 더 붙었던 거였고 다음 역이라고 했다. 이런. 어떡하지.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내 모습에 아저씨는 다음에 오는 기차를 타면 된다며 이 플랫폼이 아니라 한층 올라가서 있는 다른 곳이라고 했다.
나는 이 고마운 신사분에게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아들과 함께 2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신사분, 자신은 다음 기차까지 시간이 좀 있다고 우리를 안내해 준다는 게 아닌가. 사실 2층에 있다는 그 역을 내가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내심 걱정하며 발길을 돌리는 거였는데 이 스위스 신사분이 우리를 그 역까지 데려다준다니.
스위스에서 미아가 되기 싫었던 나는 거절도 못하고 넙죽 너무 감사하다며 그 신사분을 따라갔다.
그날이 수요일 아침이었는데 자신은 휴가 중이라고 했다. 마치 미국에서 건너온 길 잃은 모자를 구해주기 위해 마침 이 신사분이 휴가를 받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2층으로 올가 간 뒤 아저씨를 따라서 기차를 기다려야 할 곳까지 가는데 정말 이 신사분이 아니었으면 또 길을 잃었을게 분명했다.
아들과 정말 진심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내가 위기에 처할 때나 난처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뿅 나타나는 천사는 스위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위스 신사 아저씨 댁에 아들과 나는 무사히 다음 기차를 탈 수 있었고, 차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상상 속에 그리던 하얀 눈이 덮인 산과 그 아래 고요한 호수, 푸르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보다 더 높이 솟아 있는 뾰족한 산봉우리는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고 그 주변을 새하얀 구름이 에워싸고 있었고, 그 아래는 선명한 초록의 평원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줬다. 스위스 초콜릿 표지의 그림과 똑같은 풍경이 우리 앞에 차창 너머로 지나가고 있었다. 평원 아래 놓인 푸르른 호수는 뛰는 심장을 평안하게 어르만 줘주는 것만 같았다. 한참 눈앞에 비현실처럼 펼쳐진 스위스의 장관에 넋을 놓고 있는데 마침 역무원 아저씨가 지나가서 전화기 속 출발 역을 잘못 예매한 티켓을 보여주며 괜찮은지 물었다. 티켓을 보더니 아저씨는 우리가 산 티 켓은 2등석인데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1등석 칸이지만 그냥 있어도 괜찮다고 쿨하게 얘기하고 갔다. 1등석 2등석 칸을 구분하지 못하고 탔나 보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고 지나서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인터라켄 WEST (Interlaken)에 도착했다. 인터라켄은 스위스의 중남부에 위치한 베른주에 위치한 도시로 인터라켄 동쪽과 인터라켄 서쪽이 있다. 라켄이 독일어로 호수라는 뜻으로 호수 사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들이 작년에 미국 미시간주 인터라켄 여름 피아노 캠프를 갔었는데 이 인터라켄이 스위스의 인터라켄 이름을 딴 건지 이번 인터라켄 여행을 계획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가 묵을 호텔, Hotel Merkur Interlaken 은 기차역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꿈에 그리던 스위스에 오다니 그리고 내일은 유럽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기차역이 있는 융프라우에 간다니 가슴에 벅찬 설렘이 한가득했다.
아들과 식당을 찾아보다가 도보로 10분 거리에 한국 식당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 너머 하얀 설경이 얹혀 있는 산들이 빼곡히 펼쳐져 보였다.
곧 태극기가 꽂혀 있는 Restaurant Aare를 찾았고 식당 입구에는 한국 BBQ 메뉴가 보란 듯이 쓰여 있었다. 유럽 여행 오일만에 찾은 한국 식당에 우리는 스물스물 올라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삼겹살과 부대찌개를 시켰다. 둘이 먹기에 너무 양이 많긴 했지만 라면과 스팸, 애호박이 들어있는 먹음직스러운 부대찌개와 두말하면 잔소리인 우리의 최애 메뉴 삼겹살로 우린 스위스에서의 첫끼를 해결했다. 직원분들이 한국분은 아니고 동남아시아 분들 같았는데 부대찌개의 맛이 100% 한국찌게 맛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먹는 한국 음식이니 맛나게 먹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는 골목마다 아기자기한 예쁜 가게들과 기념품 상점들이 있어서 구경을 했다. 호텔에 도착했다가 잠시 나와서 쇼핑을 했는데 내일 융프라우에 올라갈걸 대비해서 스위스 국기 마크가 있는 목도리를 아들은 검은색, 나는 빨간색으로 사고 아빠 선물로는 골프 모자와 골프공을 샀다.
벌써 스위스의 인터라켄에 어둠이 지고 있었고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내일을 기대하며 스위스의 첫날밤 꿈나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