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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Sep 16. 2023

괜찮아요, 전부 다 내가 원했던 거에요

<TEEN TROUBLES>(2022)

검정치마 - TEEN TROUBLES(2022)


중년의 나이로 다시 넵워스에 선 Liam Gallagher가 마지못해 읊조린 것처럼, 진정으로 빛날 수 있는 건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할 이야기를 모두 소진해버린 기성 스타들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어린 날의 우상이었던 그들을 지켜보는 수많은 팬들을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조휴일(검정치마)이 그러한 부류의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가 TEEN TROUBLES를 통해 상기하는 열일곱 살의 강렬했던 성장통은 앨범을 '40대에 접어든 기성 음악가의 과거 회상을 담은 신보'라는 식상한 프레임에서 비껴가게 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비록 그는 Our Own Summer에서 '그건 20년 전 일이고, 더 이상 그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진술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그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난 당장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쪽이 훨씬 신빙성 있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때는 알 수 없었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난 그저 열일곱을 살던 중이었어요

귀가 찢어질 듯 매미가 울던 1999년의 여름밤
혹독하고 푸르던 계절이 깊게 긁고 간 자리

만약에 그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난 당장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 Flying Bobs


어떤 일은 저주처럼 느껴진다. 어린 날의 미숙하고 연약한 자아와 잔뜩 펼쳐진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너무도 낯설고 서툰 일들. 전달되지 못한 진심과 교묘하게 위장된 언어('불세례'), 밝게 타오른 이후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상실('매미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유혹들('미는 남자'), 평생 함께일 줄 알았지만 어느샌가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친구들('John Fry'),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로이 보내는 시간('Powder Blue'),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혹한 대가('Electra').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허탈한 마음에 새로운 세계를 탐험해 보기도('Ling Ling'), 그 철없고 쪼들리던 시절을 통째로 폄하해 보기도 하지만('99%') 그 유치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푸르른 순결함이 긁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바삭해진 껍데기 뿐이다.



그렇게 지나온 열일곱의 뜨거웠던 여름날. 하지만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놀랍게도 그는 그 시절이 차라리 평생 머무르고 싶어질 정도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음을 깨닫는다. 현재는 권태롭고 미래는 불안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추억만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더 값진 무언가로 영원히 남으니 말이다. 아직 어리기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고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상처입기 쉬웠지만, 그 어떤 경험보다도 더 강렬하고 소중하게 기억되는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지 않은가.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같은 실수들을 또다시 반복하겠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전부 다 내가 원했던 거에요
이 모든 게 다 내가 원했던 거라구요

 - Flying Bobs


앨범의 마지막 트랙은 Our Own Summer이지만, 그 끝을 장식하는 매미 소리는 오프닝 트랙 Flying Bobs와 자연스레 이어지며 결국 끝없는 여름의 노스탤지어를 완성시킨다. 앨범의 서문처럼 보였던 Flying Bobs의 나레이션은 그 여름 속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놀이기구 전체를 관통하는 안내방송으로 변모한다. 여기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니 가끔씩 꺼내보되, 뒤를 돌아보며 후회에 빠지지는 말 것.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몰랐지만, 결국 다 내가 원했던 것 아닌가. 상실도, 후회도, 그리움도, 추억도, 그 모든 것이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는 결국 미숙했던 열일곱의 그가 택한 운명을 받아들인다. 다른 트랙들과 다소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던 '어린양'에서 선언되는 젊은 치기와 '따라갈래'를 감싼 덤덤한 위트, 'Jeff And Alana'를 통해 지난 날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은 그제서야 빛을 발하며 기억 속에 잠시 가려졌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상기시킨다.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빛나던 날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런 것보다는 그때 그곳에 있었던 정서를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청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낯선 모습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과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줄의 위로가 될 수 있는지가 훨씬 의미 있는 질문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TEEN TROUBLES는 할 이야기가 바닥나버린 기성 음악가의 케케묵은 과거 회상이라기보다는, 그가 음악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며 발견한 음악적 영감의 원천, 끝없는 여름의 노스탤지어, 그리고 길 잃은 청춘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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