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장에 남긴 추억들..
1960년대 지어진 우리 집은 부엌이 아니고 정지다. 5남 4녀의 대식구라 한 번에 준비해야 하는 음식의 양도 많다. 후에는 연탄을 사용했지만, 아궁이에 장작으로 불을 때면서 밥을 해야 하던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할 때는 내가 남자라지만 같이 도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이것저것을 썰고 다듬는 사이사이 아궁이 불을 계속해서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 아궁이 불관리가 내 몫이다. 어머니가 불러서 아궁이에 불을 열심히 지피고 있노라면 갑자기 어머니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대부분 국을 끓이거나 반찬을 하기로 하고 물을 끓이는 경우다. 물을 끓일 동안 순식간에 사라진 어머니는 국거리나 반찬거리를 들고 헐레벌떡 나타난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뭐가 부족한 게 있다면 갑자기 나에게 부엌일을 맡기고 튀어 나가시는 거다. 부엌에서 가까운 매일 시장까지는 어머니의 잰걸음으로는 5분이면 넉넉하다. 이때 가장 많이 흔하게 먹었던 게 각재기하고 고등어, 갈치, 쥐치 등이다. 이런날 매일 시장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자연의 싱싱함을 냉장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던 부식 창고다.
당시 동명백화점 앞 큰 한길(중정로)에서 비행장이었던 1호 광장까지는 서귀포 뒷뱅듸라 불리는 지역으로 한참 개발이 되던 곳이다. 구도심인 솔동산이나 중정로 아래는 이미 다 개발된 상태여서 인구가 증가할 공간이 없었으나, 뒷뱅듸는 원래 농사를 하던 밭들이라 개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구도심인 솔동산과 가까운 매일시장을 중심으로는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일단 매일 시장이라는 편리한 시장이 있었고, 시장을 중심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택들로 밀집된 지역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입학하면서 서귀국민학교에서 분리된 서귀중앙국민학교가 생겼다. 처음에는 남도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서귀국민학교에 더부살이하다가 1968년에 현재 위치에 새로운 교사를 지으면서 분리되었다. 학급 친구들은 뒷뱅듸 그중에서도 매일올레시장 내외에 살던 친구들이 가장 많았다. 한 반에서 열 명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시장통 아이라고 놀릴 수도 없었다. 당시에는 시장이라는 게 문명의 이기로 뭐든지 살려면 가야 하는 편리한 곳이기에 시장통이 놀림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애도 시장통, 운동을 잘하는 애도 시장통. 힘이 센 친구도 시장통에 살기에 전혀 문제 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만큼 시장에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시장통에 사는 친구네가 모두 장사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주거용 주택에 사는 친구들도 많았다. 당시에는 지금같이 시장의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방된 술집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신 곳이 매일 시장 통나무집이다. 빈털터리 학생 시절이었다. 가벼운 주머니를 털어서 안주 한 사라에 소주 몇 병값이 모아지면 지금의 매일올레시장으로 간다. 좀 여유가 있거나 든든한 물주가 있는 날, 또는 남녀가 섞이는 날은 동명백화점 앞 지금의 이중섭거리 입구를 거쳐 삼일빌딩 사거리로 간다. 거기에는 레스토랑과 생맥줏집들이 있었다.
상설시장에서 단골은 경민이네 집과 통나무집이다. 통나무집은 통나무횟집으로 상호를 바꾸고 지금도 그 위치에 다른 분위기로 있다. 기본 안주만 있어도 술을 두어 병 마실 수 있는 나이다. 그래도 분위기를 잡고 술집 사장님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기 위해서는 안주를 시켜야 한다. 메뉴판을 한참 살피고는 제일 저렴한 안주 하나를 시킨다. 그래야 주머니가 가벼운 단골인 우리에게 주인장이 서비스를 줄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니고 분위기를 마시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안주 하나에 소주 한 병을 놓고 몇 시간 죽쳐 앉아 있어도 주인장은 싫은 내색을 안 한다. 단지 분위기를 살피다가 서비스 안주를 내줄 뿐이다. 이제부터는 좋은 술집으로 단골이 되는 것이다. 다음부터 주인장님은 형님이거나 누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통나무집과 경민이네 집이 비슷한 컨셉인데 바로 붙어 있었다. 번갈아 다녔는데 어느 날 경민이네 집이 없어지고, 맞은 편에 비슷한 선술집이 생겼다.
밤 10시에서 11시가 되면 영업 종료 시각, 아니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의 막차 시간이다. 당시에는 심야 영업이 없었다. 모두 문을 닫아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마지막 시내버스를 타고 잠시 집으로 가야 한다. 잠시 쉼을 택해야 한다. 모든 가게 문이 닫힌 시장통을 투덜투덜 걸어 다니다가 집으로 들어간다. 그 시간이면 모든 게 멈추는 시간이다.
시장통에는 학교 친구들이 많았다. 유독 생각하는 게 야채가게를 하던 용우네 집이다. 용우네 할머니와 부모님이 매일 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했다. 장사가 다 끝난 저녁 무렵이면 그 집 옥상은 우리들 차지였다. 할머니가 거구이시고, 걸걸하셔서 군대환 할머니라고 주위에서는 불렀다. 이 집 손자인 용우는 기타를 잘 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밤무대에서 연주 활동도 했었다. 용우는 학교 공부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타였다. 한참 통기타가 유행하던 시기라 친구들이 하나둘 기타를 메고 나타난다. 그때는 밤에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소리를 질렀는데도 왜 아무도 시끄럽다고 얘기를 안 했는지 궁금하다. 지금 용어로 버스킹이다. 마냥 인심이 부러운 시대였다.
1979년 이 집에서 친구들과 같이 라면을 끓여 먹던 어느 날이었다. TV에서 10.26사태 수사 발표를 하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모습을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두환의 처음 데뷔하는 무대였다. 나중에 대통령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대머리가 하도 인상적이었기에 지금도 기억네 남는 모양이다.
시장은 사람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릴 적 매일시장이 나에게 주는 느낌은 고향이었다. 어머님 품속과도 같이 온갖 정이 묻어있는 곳이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다시 찾아가 본 매일올레시장은 아주 낯선 타국 같은 느낌이었다. 시장에서 제주와 고향의 맛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수산물이 많다는 것, 제주산 귤을 많이 판다는 것뿐이었다. 제주의 시장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잘 정돈된 점포들과, 간판, 아케이드와 편의시설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전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평균적 수준의 시설과 모습들이다. 제주가 아니어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더 이상 제주의 맛을 앗아가 버리는 일들이 없었으면 한다. 서귀포의 매일올레시장으로 특화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