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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Sep 21. 2024

엄마의 마음을 녹이는 말 한마디

자식들은 언제 부모의 마음을 알까?

60대 중반, 요즘은 누구를 만나든 화제는 자녀 결혼과 손자를 키우는 즐거움에 관한 얘기다.

난 아직 그 맛과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한 발짝 물러선 방관자가 된다. 관심이 없는 것같이 남의 얘기로 흘려듣는 척하지만 사실 멀지 않아 나에게도 다가올 현실이기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얼마 전 일이다. 오래전부터 같은 활동을 하는 동료와 점심을 같이 했다.

자주 만나고 이런저런 일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지만 사적인 얘기는 가급적 안 하는 편이다. 이렇게 둘만이 만나는 자리도 흔한 경우는 아니다. 자리에 앉고 주문을 끝내자마자 그분은 나에게 자녀들은 무엇을 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했다. 사실 뜬금없는 질문에 조금은 당황스럽기는 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 해서 먼저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큰아들이 몇 번의 도전으로 한의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어렵게 뒷바라지했고 학업을 마쳤는데, 아들은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선언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결혼 선언에 매우 당황했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요즘은 자녀들이 결혼하지 않아서 부모와 사회가 걱정하는 세상이다. 결혼하겠다면 축하해줘야 하는 일인데…. 왜 당황하는지에 대한 사연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번의 도전 끝에 한의대에 진학을 하고, 한의사가 된거라 거의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부모로서는 아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데 어려워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거의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제주를 떠난 육지 생활을 지원한다는 것은 보통의 가정에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중에 아들이 한의사가 되면 모두 해결이 될 거라는 유형, 무형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녀 교육에 올인한 부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부모의 기대를 안고 있던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자기만의 세상을 찾아서 떠나겠노라고 선언을 해버렸으니, 부모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이제 자녀 교육에 올인한 대가로 남는 상처와 흔적은 고스란히 부모 몫이 되었다. 아들은 처가에서 내준 건물에 한의원을 차렸고, 잘살고 있다고 한다. "게메예, 모르쿠다.."하면서 흐리는 말끝마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는 마음이 잔뜩 묻어났다.  

어느 순간 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치 나의 일인 것 같이 대화에 몰입되어 공감하고 있었다.


나도 결혼 적령기 두 딸을 두고 있다.

우리 애들은 이 얘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할까? 어떻게 생각할까? 내 딸들이 어느 날 갑자기 결혼하겠노라고, 내 곁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하면 나는 어떤 감정일까?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까? 쉬이 감정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 나도 그분과 같이 자녀 교육에 올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혼과 가정, 부모에 대한 젊은이들의 생각이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문뜩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잠깐 점심을 하는 자리였다.

둘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핫 이슈인 결혼과 가정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결혼과 자녀 뒷바라지, 그리고 그것에 올인했던 부모와 그들의 자녀 사이를 얼룩지게 만드는 생각과 사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손주를 둔 친구들은 자식보다는 손주가 눈에 더 밟힌다고 한다.

자식은 미워도 손주는 아깝다고 하는데 아직 사위나 며느리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사실 이해가 가지는 않는 다. 그렇게 황단하게 떠난 자식은 미워도 손주가 보고 싶어서 종종 손주를 보러 아들 집을 방문한다고 한다. 동료분이 손주를 보러 가는 날, 공항에 마중 나온 손주가 할머니를 보자마자 품에 안기면서 뜬금없는 말을 해서 놀라게 했다고 한다.

" 한의사, 수의사, 선생님을 길러낸 훌륭한 우리 할머니"라고 속삭이면서 슬며서 엄지척했다고 한다. 

어린 손주의 칭찬에 기쁘기도 했지만 이게 뭔가 하는 이상한 생각에 아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들은 본인도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다 보니 이제야 어머니에게 좀 미안했던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직접 얘기하기는 쑥스러우니 아들을 통해서 어머니에게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죄송해요!” 어릴 적 말썽 피우다가 들킨 표정으로 아들은 쑥스럽게 자백했다고 한다. “어떡합니까? 풀어야죠” 그분은 비로소 미소 띤 모습을 보였다. 아들의 투박한 자백으로 마음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섭섭함을 풀기로 했다고 한다.


얘기를 마무리하고 집에 오는 길, 문득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글귀가 생각이 났다.

미치 앨봄의 신작 <에디의 천국>에 나오는 대목이다. 

"부모는 자식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자식이 부모를 놓아버린다. 자식들은 부모를 벗어나고 떠나버린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칭찬하거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그들의 존재가 확인됐지만, 이제는 스스로 업적을 이루어 간다. 자식은 나중에 피부가 늘어지고 심장이 약해진 후에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살아온 내력이, 이룬 일이 부모의 사연과 업적 위에 쌓이는 것임을. 돌을 쌓듯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것을. 그들의 삶의 물살 속에 그렇게 쌓여 있음을."



이제 세월을 먹은 아이들은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그들을 키우면서 때로는 속앓이를 하기도 하고, 아쉬움을 가질 때도 있지만 결국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정도는 세월의 연륜과 엇비슷하게 맞물려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부모 마음을 몰라주는 자식에 대한 아쉬움을 거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이 커서 아이들을 키울 때 정도가 되어서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른들이 무사 손주를 아들보다 더 좋아하는지 알아?"

" 손주가 자식한테 이제 내 원수(?)를 갚아줄 사람이랜 생각해서 기뻐하는 거라.."

언젠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시간, 옆자리에서 누군가 들려주던 얘기다. 설마 하고 웃어 넘긴 얘기다.

 

스스로 경험하기 전에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정말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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