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별기획 | 제578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10월 9일, 한글날.
여러분에게 한글은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주변 세계를 이해합니다. 각 언어는 특정 문화의 가치관과 역사, 고유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전 세대의 문화를 담고 있는 언어는 우리 세대에서 수정•변형되며 새로운 관점을 반영하기도 하고 다른 문화적 뉘앙스를 갖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글자는 말소리나 생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당시의 문화와 생활상을 활자화하여 ‘기록’의 형태로 탈바꿈시킵니다. 이러한 기록은 같은 세대 내에서 공유되고, 다음 세대에 전승되어 지식을 축적하고 문화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합니다.
하지만 만약 글자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인의 생각이나 의견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과 15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글자가 없었습니다. 한국말은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만의 글자로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약 1,000년 전부터 중국의 한자를 가져와 우리의 언어 체계에 맞게 변형하거나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두, 구결, 향찰을 들어보셨나요? 이들은 한자의 몇몇 자에서 음이나 뜻을 선택해 한국어의 조사나 어미의 역할을 부여하는 문자 체계입니다. 자주 쓰이는 조사와 어미를 기호화하여 한자만 사용하는 것보다는 편리해졌지만, 그럼에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언어 체계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 우리 생각을 온전하고 정확하게 적어낼 수 없었고, 작문 어순도 여전히 한문 문법을 따랐니다. 따라서 말로 내뱉은 것을 바로 글로 적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어로 내뱉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한문 문법에 맞게 번역해야만 비로소 종이에 옮겨 적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한자의 사용이 계층 간 언어 불평등을 야기했다는 것입니다. 한자를 읽고 쓰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양반 계층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반면, 평민으로 대표되는 일반 백성들은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며 생계 유지를 위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체 인구 중 소수만이 문자 생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자가 있으니 우리의 글자가 없는 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글자를 몰라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조선의 평범한 농민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어느날, 관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와서 여러분이 지난주에 발생한 저잣거리 도난 사건의 범인이라며 관아로 가자고 합니다. 관아에 도착해보니 웬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가득한 종이를 내밀고는, 얼른 읽고 지장을 찍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영문을 모른 채 높으신 분이 하라는 대로 지장을 찍겠지요. 그렇게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며 누명을 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네 번째 왕, 세종은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서 겪는 어려움을 안쓰러이 여겼습니다. 만백성이 쉽게 글을 배우고 익혀 사용할 수 있도록 1443년 조선만의 문자 체계인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간단하고도 요령이 있으며, 정밀하고도 잘 통한다. 그러므로 슬기 있는 이는 아침을 마치기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넉넉히 배울 것이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훈민정음은 한자에 비해 매우 쉬운 글자였습니다. 한글은 모양과 소리를 일치시킨 '표음 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음과 모음 모두 입안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지요. '표의 문자'인 한자는 글자의 모양만 가지고는 그 발음을 알 수 없습니다. 모양과 뜻과 발음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다르게, 한글은 글자에 담긴 뜻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글자 그대로를 읽기만 하면 그것이 곧 의미를 형성했습니다.
'바람 소리와 학(鶴) 소리와 닭의 울음과 개 짖는 소리라도 잘 적을 수 있다.’
세종대왕은 총 28자를 만들었습니다. 해례본 서문에 따르면, 그 28자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잔디밭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나 까마귀 우는 소리도 나타낼 수 있고, 지나가는 자동차와 트럭의 소리를 구분해 전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는 자음 14개 모음 10개 총 24자만 남았으나, 이들로 만들 수 있는 음은 무려 1만 1천 172가지에 달합니다. 다른 언어들이 약 1천 개의 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글이 소리를 시각화 하는 데에 매우 특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말을 우리만의 글자로 손쉽게, 세밀히 표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글의 정착은 쉽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한글을 익혀 잘 사용하기를 바랐던 세종대왕의 바람과는 달리, 곧 사대부 계층의 큰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전까지 양반 계층은 한자를 사용하여 글자 권력을 독점해왔기 때문에, 한글을 통해 모든 백성이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국의 문자를 우리의 것으로 바꾸는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성리학자였던 최만리는 한글 창제에 대해 "용음합자는 옛것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여기에서 '용음합자'란 소리를 이용해 글자를 만드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한글이 소리와 모양을 일치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대에 부딪혔다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리와 모양을 일치시키는 방식은 한자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450여 년 동안 한글은 철저한 탄압과 배척 속에서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하층 계층의 언어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1894년, 언문은 국가의 공식적인 글자로 인정 받습니다. 고종의 칙령 제1호 공문 규정 제14조,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고종은 국가 문서의 공식적인 표기를 한글로 할 것임을 명시합니다. 그 명칭을 '국문'이라 지칭하여, 지난 450년 간의 천대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조선 말에 이르러서야 언문이 비로소 국문(國文)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얼을 담은 한글은 일본에 의해 말살 위기에 놓입니다. 일제는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칩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주시경, 이우영, 최현배와 같은 학자들이 한글을 보급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26년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한글날 기념식이 개최됩니다. 조선어연구회와 신민회가 공동 주최했으며, 당시에는 '한글날'이 아닌, '가갸날'로 불렸습니다.
이 첫 한글날 행사는 위에 보이듯, <이 하늘과 이 땅위에 거듭퍼진 한글의 빛>이라는 신문 속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날은 '언문'이나 '정음' 정도로 불리던 우리의 글자에, '한글'이라는 이름이 처음 정식적으로 제안된 날이기도 합니다. 1913년 주시경에 의해 '한글'이 처음 제시되기는 하였으나, 이후로도 이름이 통일되지 않고 가지각색으로 불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날을 조금 더 공식적인 명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으뜸이 되는 글, 오직 하나뿐인 큰 글, 무한한 우리글.
'한글'의 의미입니다. 참 아릅답지 않나요? 글자가 없어 서러워하던 오랜 세월을 지나,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리를 표현해주는 우리만의 글자가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때론 그 가치와 의미를 잊어버릴 때도 있지만, 한글의 578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우리글의 소중함을 되새겨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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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기획팀 이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