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ena J Mar 31. 2024

막연한 두려움 뒤에는 희망도 따라오더라

어렴풋이 잠에서 깨었을 때 침대에 누워있던 내 등뒤를 쓰다듬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순간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눈을 스르르 감은 후 다시 휴식을 취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같은 느낌이 느껴졌습니다. 


등을 돌려서 전자시계를 보았습니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출근 준비를 위해 몸을 벌떡 일으켜서 침대를 나왔습니다. 


침대 뒤쪽으로 가습기와 비슷한 용도의 디퓨져를 작동시켜 두고 수면을 취했는데 그 수증기의 느낌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습니다. 


그렇지만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잠을 자는 습관이 있는 저였고 그 느낌은 분명 이불속의 내 등을 어루만지는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게다가 수증기는 제 등까지 닿을 정도로 그렇게 세기가 세지가 않았습니다. 


세금환급금을 기다리며 캐나다 국세청으로부터 환급금 결정 관련 이메일을 2주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눈을 뜨자마자 이메일 확인을 한동안 해왔었습니다. 


지난달 한국방문을 하면서 캐나다 신용카드로 사용을 많이 하여 이번달 청구금액이 상당히 많이 나왔습니다. 항공권료 숙박료 그리고 아이와 저를 위한 한약비 등등 15일 동안의 한국 방문으로 사용한 금액은 상당히 컸습니다. 


매년 환급받았던 세금환급금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올해에도 그 정도는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캐나다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환급신청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청구서에 찍힌 카드사용금액을 커버할 수 있는 환급금이 계산이 되었습니다. 


세금환금 신청 후 2주 안에 환급금이 바로 입금이 되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신청서류를 제대로 잘했는지 심사 중이고 올해의 세금환급금 신청건 외에도 캐나다 국세청으로부터 지급받고 있는 다른 항목들도 함께 심사대상으로 진행 중이라는 안내메시지도 함께 보이는 것을 보며 숨이 확 막히는 듯하였습니다. 


작년 세금환급금 신청 때 서류상으로 증빙을 할 수 없었던 항목이 있었는데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으로 신청을 했던 것에 관련 증빙서류를 첨부하라는 메시지를 이후 6개월 후에 받았었습니다. 


이 통지서도 이메일 알림을 받지 못했기에 그쪽에서 제시한 기한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관련 서류를 업로드하였었고 또한 제가 제출한 세부 내역이 세금환금 때 신청했던 내용과 조금 다르다는 알림을 또다시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올해 세금환급금을 못 받는 것일까 하는 불안함과 함께 주변 사람들이 세금환금 신청을 잘못하여 페널티를 원화로 대략 1천만 원 정도 내어야 했다는 소식을 온라인에서 접하며 저의 심장을 더 오므라드는 듯하였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생각을 정리를 한 후 2차 계획을 세워두었기에 그나마 눈을 뜨자마자 국세청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는지를 확인하는 불안함을 통제할 수 있었고 마음속의 조바심도 덜 가질 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엄아인 저는 우울감으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감정치료 관련 한약을 더 지어주어 아이들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한국 계좌로 송금할 여유 자금도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 퇴근 후 주차장의 차 안에 앉아서 전남편이자 아이들 아빠를 향해 "야~ OOO, 애들 한약 지어주게 돈이나 좀 보내라.'라고 답답해서 혼잣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혼 후 아이들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혼서류에 양육비 관련 내용을 적을 때에도 최소한의 금액을 형식상 적었었고 이 돈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시에 저에게 말로 언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벌써 이혼한 지 15년쯤 되었고 아이들의 나이는 어느새 만 18세가 되었습니다. 


그 15년 동안 아이들이 생각이 나면 아주 가끔 양육비명목으로 제 계좌에 입금하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유지된 적은 없었으며 그것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연락을 끊어버리기를 그동안 수차례 반복을 해왔었습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생활을 하면서 더 더군다나 캐나다로 이민을 하면서 다급하게 목돈이 필요할 때 연락을 해보아도 나 모른 척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속적으로 일을 하여 일정한 수입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상황을 저 스스로 이해하였기에 그 사람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의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저의 상황이 경제적으로 다급해서 살길이 막막해질 경우는 자신의 자식도 나 몰라라 하는 그 사람의 행동에 원망이 가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을 카톡으로 격한 감정을 메시지로 주고받으면서 양육비 지급을 안 할 경우 징역이나 벌금으로 법적으로 대응할 수가 있다는 기사를 링크하여 보내며 


'너 그동안 밀린 양육비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너와는 더 이상 대화할 일 이 없다. 법대로 해보자.'라고 말을 한 후 더 이상의 메시지에 대응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잘됐네, 먹고살 곳이 없는데 감옥 들어가면 밥은 먹여주어서 좋네'라는 답글을 보냈던 그 사람의 이름으로 얼마가 지난 후 1백만 원씩 제 계좌에 입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15년이란 시간 동안 몇 번 동안 그 사람이 아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보냈던 양육비는 회당 50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에게 법적으로 응대를 하겠다는 저의 메시지를 받은 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보내는 금액은 그 2배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정말 꾸준하게 보내왔었습니다. 매월 못 보낼 경우는 몇 개월 만에 월 500만 원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OOO, 너도 나이 50먹더니 이제 쫄보가 되었군...' 하는 생각이 제 마음속으로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실제로 그 사람을 법적으로 대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모아둔 재산은 당연히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고 거주지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감정소모 시간낭비가 되는 일을 벌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사람은 정말 꾸준하게 1년이 넘게 양육비를 입금시켰왔습니다. 


그랬던 것이 최근 들어 몇 개월간 또 중단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캐나다 한국 2중 국적이고 만 18세가 되면서 한국국적이탈을 해야 했기에 아이들 친부 관련 서류를 신청하면서 그 사람이 이름을 또 개명했다는 것을 통해 캐나다 주한 영사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관련 서류 때문에 아이들 친부에게 영사관에서 꾸준히 연락을 취했지만 받지 않는다는 내용도 전달받았습니다. 


'아, 그랬구나. 네가 또 개명을 했구나.'

'그래서 이제 양육비 지급을 중단하였던 거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름까지 바꾸었으니 자신의 예전이름으로 제가 소송을 걸어도 본인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을 하고 한동안 지급해 왔던 양육비를 중단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이제 그 사람으로부터 돈이 입금되는 기대를 가진다는 것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저였지만 그날은 너무도 답답했기에 퇴근 후 차 안에 앉아서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이었습니다.


잠결에 등 뒤를 다듬는 손길을 느꼈던 그날, 출근 후 이메일을 확인하였을 때 캐나다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이 온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걱정반 희망반으로 국세청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했을 때는 제가 신청한 세금환급금이 며칠 내로 지급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계좌에 1백만 원이 입금이 되었습니다.'라는 한국 거래은행의 계좌로부터의 알림 메시지도 함께 그날아침 받았습니다. 


개명된 그 사람의 이름이 찍힌 금액이 정말 입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 그 등뒤의 느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를 쓰다듬어 준 영적인 손길의 느낌이었을까?'


1년 전 돌아가진 엄마가 문득 떠오르긴 했습니다.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종교에 몰입하는 열성 신도는 아닙니다. 


종교가 없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껏 살면서 영적인 느낌을 어렴풋이 받거나 본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제 나이 20대 초반에 함께 어울려 다녔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적에 어린 나이임에도 아들이란 이유로 상주가 되어있던 친구를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대낮에 집에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눕힌 후 잠을 자다가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새하얀 도포를 입은 한 남성분이 누워서 자고 있는 저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고 계셨던 모습이 느꼈었습니다.


왠지 그 친구의 아버지가 고맙다고 저에게 인사를 전하러 오신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이제는 신용카드 청구액을 결제할 돈이 생겼으며 아이들의 한약을 지을 돈도 들어왔습니다.


혼자 아이 둘을 키워오면서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에 마주칠 때면 정말 구원의 손길처럼 그 해결책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나타나곤 했왔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운을 믿고 무대책으로 계획 없이 생활을 해온 적은 없었습니다.


싱글맘 외벌이의 삶은 때로는 고달프지만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기다는 희망으로 그때그때의 고비를 만나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명인의 비극이 때로는 나에게는 약이 되기도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