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에서 익숙함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설레임 가득한 여행.
1. 재즈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예술음악이기 때문이다.
2. 예술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본 정보가 필요하다.
3. 개인마다 각기 다른 음악적 취향이 있는데, 그 그 음악적 취향은 본인의 성향과 관련이 있다.
4.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의 성향은 사색적이고 내향적이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뭘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일단 들어봐야 뭔가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은가?
재즈 입문을 고민하고 계시다면,
단연코!
“재즈 스탠다드부터 들어 보세요”라고 권하고 싶다.
재즈 초심자들의 시작점으로 가장 좋은 선택은 재즈 스탠다드이다.
재즈 스탠다드란?
재즈 음악가들이 즉흥 연주와 해석의 기반으로 삼는 곡들인데
재즈를 연주하는 기본 재료이자,
오랜 세월 동안 재즈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사랑받아 온 공통 언어이다.
이 곡들은 다양한 장르와 시대를 아우른다.
브로드웨이, 스윙, 비밥, 라틴, 모달, 현대 재즈까지,
각 시대와 문화의 다양성만큼이나
그 스탠다드 재즈의 스타일도 풍부하고 다채롭다.
이 풍부하고 다채로움이 재즈를 풍성하게도 하지만
재즈를 처음 듣는 분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부분 중 하나이다.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자.
그렇다면 왜? 스탠더드부터 듣는 것이 좋을까?
재즈를 처음 듣는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낯선 도시의 골목으로 무작정 걸어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작은 골목들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처음 보는 처음 보는 표지판들은 내게 전혀 친절하지 않다.
심지어, 외국 여행이라면 글자의 형태들 마저 익숙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그럴 땐,
누구나 한 번쯤 지나갔을법한 길부터 걸어보는 게 좋다.
그 길이 바로 재즈에서는
스탠다드 넘버들이다.
다행히도,
재즈 스탠다드는 귀에 익숙한 곡들이 많다.
많은 고전재즈 스탠다드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영화 음악,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곡 또는
미국, 유럽 대중가요에서 태어났다.
"Summertime"
- 앞에서 이미 들었다.
"Fly Me to the Moon"
- 아폴로 11호에 실려 달나라까지 날아간 범우주적인 히트송이다.
"Autumn Leaves"
- 고엽이라는 매우 촌스러운 번역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다.
" Someday My Prince Wil Come " 같은 곡들.
이 중, 백설공주의 주제곡으로 이야기해 보자.
1937년, 당시, 래리 모리와 프랭크 처칠이 작곡하여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대히트작 백설공주의 주제곡으로 쓰인 곡이
재즈 스탠더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시 애니메이션계의 디바라 불리며 백설공주의 목소리를 연기한
애드리아나 카셀로티의 공도 컸지만 ( 이미 이 시기에 립싱크가 성행했다 )
월트 디즈니는 이 곡의 엄청난 잠재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당시로서는 최초로 영화의 개봉과 함께
이 영화의 O.S.T. 마케팅까지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4년 6월 22일, CBS에서 공식 방영된 특별 프로그램에 의하면
미국 영화 연구소(AFI, 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선정한
"AFI's 100 Years... 100 Songs" (위대한 영화 노래 100선) 목록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삽입곡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은 역대 19위를 기록했다.
어마어마한 일이다.
지금까지도 대중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는 이곡은,
1957년, Dave Brubeck라는 재즈 피아니스트에 의해
본격적인 재즈 스탠더드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Dave Brubeck은 < Dave Digs Disney >라는 앨범을 통해
3/4 박자 왈츠와 4/4박자의 경쾌한 스윙 재즈를 넘나드는 획기적인 편곡으로
재즈 연주자들과 재즈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간략하게 주멜로디를 피아노로 잠깐 연주하고는
바로, 폴 데스몬드의 색소폰 즉흥연주로 이어진다.
중반부를 지나 마지막까지 데이브 브루벡의 피아노 즉흥연주가 거의 끝날 때까지
이게 왜?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이라는 걸까?
라고 난감해할 때 즈음
엔딩의 겨우 몇 마디를 원곡의 멜로디에서 빌어와 연주를 끝맺는다.
그 노매 즉흥연주가 주가 된 연주여서 그렇다.
원곡의 코드/화성 안에서 원곡의 멜로디를 이리저리 뒤틀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멜로디를 작곡하여 즉석에서 연주는 하는 것을 재즈의 즉흥연주라 한다.
이 곡은 그 즉흥연주에 집중하여 연주했고
그 즉흥연주가 이 연주의 감상 포인트이다.
그나마, 데이브 브루벡의 피아노 솔로 즉흥연주 부분은
집중하여 듣는다면 가끔씩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곡의 멜로디들이 살짝씩 뒤틀려있기는 하지만 귓가를 스친다.
경쾌한 드럼과 베이스의 리듬 위를 춤추는
피아노의 뒤틀린 원곡 멜로디를 찾는 재미가 쏠쏠한 연주다.
누군가 그랬다.
재즈 연주자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 연주하고
재즈 마니아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낯선 멜로디에 설렌다고.
그 낯선 설레임의 주체가 재즈의 즉흥연주이다.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이라면
Miles Davis의 1961년에 발매된 연주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익숙한 우리 백설공주의 멜로디가 들린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는
동화 속 백설공주의 멜로디가 아닌 어른의 멜로디로 뒤틀었다.
낯설다.
동화 속 ‘왕자님’은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마일스는 ‘하몬 뮤트’라는 장치를 트럼펫에 사용하여
트럼펫 음색이 가녀리고 부드럽다.
마치 누군가 귓가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전형적인 즉흥연주방식 대로
최대한 음표의 수를 줄여 불필요한 음을 소리 내지 않는다.
여백을 연주한다.
음표보다 쉼표로 이야기한다.
이 연주를 통해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은
여기서 함께 연주에 참여한 음악가들을 기억해 두면 좋다.
1960년대, 당시를 대표하는 재즈 연주자들이 모두 모였다.
이 연주에는 재즈 역사상 최고로 불리는 테너 색소폰 연주자가
두 명이나 동시에 등장한다.
먼저 나오는
행크 모블리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나중에 등장하는
존 콜트레인은 강렬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두 대가가 같은 곡을
같은 곡 안에서 어떻게 연주하는지
비교해서 들어 보는 것도 이 곡의 백미이다.
재즈 역사상 가장 완벽한 반주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피아노의 거장 윈튼 켈리의 피아노는 조용하지만 섬세하다.
Mr. P.C. 인 폴 챔버스(베이스)와
언제나 밴드의 뒤를 책임지는 타고난 드러머 지미 콥(드럼)은
3/4박자의 왈츠 리듬을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살랑살랑, 사뿐사뿐 발끝을 내딛는다.
1960년대의 재즈를 대표하는 7명의 거장이 빚어낸 앙상블을
최고의 재즈 스탠다드 넘버로 들을 수 있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이 곡은 특히나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사랑했던 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누구나 아는 친숙한 멜로디 이면서도
원곡 자체의 멜로디가 너무도 아름답다는 이유를 전제로
곡 자체의 구조나 화성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해석하기 너무도 좋은
백지 같은 음악적 캔버스라는 점 때문에
많은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단골 메뉴로 여러 앨범과 무대 위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빌 에반스의 1959년 리버사이드 레이블에서 발매된 앨범
< Portrait In Jazz >에 수록된 연주는 최고의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 연주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위의 연주들 모두 재즈 팬들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이다.
개인적으로 자주 찾아 듣는 애착 백설공주 주제곡은
1998년 발매된,
Fred Hersch와 Bill Frisell의 듀오앨범 < Songs We Know >에 실린 연주이다.
피아노와 기타의 대화가 정갈하고 아름답다.
많은 사랑을 받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곡들이
거듭 재즈 연주자들과 재즈 팬들의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디즈니의 주제곡들이 재즈 스탠더드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 When You Wish Upon a Star ] (피노키오)는
많은 재즈 보컬과 연주자들이 즐겨 부르고 연주하는 재즈 스탠더드이며
[ Alice in Wonderland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위에서 먼저 소개된
데이브 브루벡 콰르텟(Dave Brubeck Quartet)의 "Dave Digs Disney" 앨범에 수록되면서
많은 재즈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 The Bare Necessities ] (정글북) 또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 이 곡을 재즈 스타일로 재해석하여 자주 연주했고
[ Chim Chim Cheree ] (메리 포핀스)는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이 "Duke Ellington Plays Mary Poppins" 앨범에서
이 곡을 포함한 "메리 포핀스"의 곡들을
재즈로 편곡하여 연주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확히 곡명을 알고 있지는 않더라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
귀에 익숙한 선율은 초행길의 불안함을 덜어준다.
어려운 즉흥 연주가 이어져도,
얼핏 얼핏 들리는 익숙한 선율이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처럼
연주의 흐름을 밝혀준다.
보컬 스탠더드라면 더 직관적이다.
가사 안에 분위기와 서사가 담겨 있다.
멜로디만으로는 모호했던 감정이
노랫말을 통해 나아가야 할 길의 실마리가 되어준다.
초심자에게 보컬 재즈는
믿음직한 음악적 내비게이션이 생기는 순간이다.
재즈는 낯선 길에서 익숙함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설레임 가득한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