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a Jan 31. 2024

편지 넷,

-길복순과 전우원 이야기-

    

위트릴로,

벚꽃이 만발합니다. 어제 본 ‘길복순’식으로 말하자면 ‘작업’할 존재들이 가득합니다. 곧이어 강한 칼바람이 불면, 비처럼 꽃이 떨어지고 ‘작품’이 완성되겠지요.




영화의 영어 제목이 ‘킬복순(Killl Booksoon)’이듯이 주인공은 킬러입니다. 첫 장면부터가 살인으로 시작하고 있지요. 청탁받은 야쿠자를 처치하는 길복순. 그녀는 공정하게 승부를 겨루자며 자신을 그렇게 자극했던 딸 이야기를 꺼내지만, 결국 무기를 바꾸겠다는 핑계를 대고 총으로 야쿠자를 쏘는 것으로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살인했던 것은 열일곱 살, 대상은 친부였지요. 흡연하는 것을 아버지한테 들켰을 때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얻어맞고 담배를 씹어 삼켜야만 했던 그녀는 마침내 복수하고 만 거였지요. 임무를 받고 나타난 차민규는 친부를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일을 꾸미지만, 예기치 않게 그녀와 맞닥뜨리게 되었지요. 그게 인연이 되어 그는 그녀를 킬러로 키우게 됩니다. 길복순에게는 첫 살인을 저질렀을 나이의 딸 재영이 있지만, 재영은 한창 사춘기 무렵이어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엄마한테 반항하기 일쑤이지요.



 


위트릴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을 훌쩍 넘기지만,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벚꽃잎이 휘날리듯 살인이 저질러집니다. 액션 영화에서 흔히 그렇듯 주인공은 절묘하게 피하고 살아납니다. 오래전 차민규가 열일곱 살이던 길복순을 살려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목격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재치있게 입장을 바꾼 영특함과 그 순간에 본 환한 미소였습니다. 연분홍빛으로 마음을 순하게 채우던 그 순하고 복스러운 길복순의 미소 말에요. 길복순이 어떻게 딸을 가졌는지, 딸의 친부는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차민규와 길복순이 대놓고 사랑을 한 것도 아닙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롯이 혼자서만 간직한 채 살아왔지요.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불러보지도 않던 사랑을 길복순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딸한테 애정을 쏟아내지요.


 

그녀의 딸 재영은 고급 사립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의사 표현을 정확하게 하는 똑 부러지는 아이지요. 재영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한 여학생한테 표출합니다. 그것을 다른 아이한테 들키게 되고 협박을 받게 되자 충동적으로 그 아이의 급소를 찔러 상처를 입힙니다. 그게 화근이 되어 정학 처분을 받게 되지요. 엄마는 엄마대로 딸은 딸대로 비밀에 휩싸인 채 음울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서로는 숨겨오던 사실을 알게 되지요. 엄마는 청부살인업자라는 사실, 딸은 동성애를 하고 흡연을 하고 있다는 것. 급기야 딸은 차민규를 죽이는 엄마의 모습을 실시간 동영상으로 보게 됩니다. 이제 결정적인 치부가 들켰다고 좌절하며 도착한 엄마한테 딸은 한마디를 남깁니다. “수고했어. 이제 쉬어.” 

재영은 자신을 농락하고 결별을 선언했던 여자친구한테 이별을 고하고 학교를 떠납니다. 작별의 말은 섬뜩합니다. 



“고민했어. 여기서 너한테 키스해버릴까, 아니면 죽여버릴까. 잘 지내.” 

그리고 미소를 머금으며 당차게 학교를 나섭니다. 모든 것은 ‘원칙’이 있지요. 차민규가 세운 청부살인업체 ‘M. K. ENT’는 회사의 청탁에 절대복종, 미성년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강력한 강령을 내세웁니다. 웃으며 가볍게 술 한잔을 했던 후배, 동료, 심지어 차민규의 동생과 차민규까지 죽이게 된 것은 길복순이 이 원칙을 무너뜨린 한 사건 때문이었지요.



그것조차 길복순의 원칙 때문입니다. 그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살인을 청부했던 정치가인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살려주지요. 그녀가 자신의 딸을 키우는 것도 하나의 원칙입니다. 직업은 킬러이지만, 자신의 딸과 집안의 화초만큼은 살뜰하게 보살피는 원칙을 잘 지켜나가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차민규는 그야말로 또한 원칙의 대가입니다. 가슴 깊이 품고 있던 길복순이지만, 원칙을 어겼고, 자신의 동생을 죽였으니 그녀를 살려둘 수 없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결국 길복순이 대결에 승부자가 되었고, 그녀는 뻑적지근한 하루를 “이제 씻을게.”라고 딸한테 말하며 마무리합니다. 다들 자신의 원칙에 충성 복종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원칙에 어긋나면 그 무엇도 가차 없이 처단하고 말지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우수수 벚꽃들을 떨어뜨리는 무심한 바람처럼 말입니다.


 

위트릴로,

이것은 강력한 스키마(Schema)의 작용입니다. 스키마는 정보와 지각을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적 개념 틀을 말합니다. 지각되는 것들을 간편하게 처리하도록 돕는 체계화된 사전지식이기도 합니다. 스키마는 경험의 축적이고 인지 발달의 소산물이지만, 과거의 덫에 자주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인지의 틀 안에 가둬놓는 스키마로 인해 살아갈수록 점점 편견과 아집과 자만에 빠지게 되지요. 그것을 깨고 나오는 것은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죽음과 부활만이 스키마를 깨고 새롭게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길복순이 아무리 딸을 사랑하고, 꽃과 식물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녀는 스키마 안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갈 뿐입니다. 고전적 킬러 영화인 ‘레옹’ 역시 강력한 스키마 안에 갇혀 있지요.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 언뜻 보면, 인간적이고 멋진 것 같지만, 스키마 안에서 놀아나는 꼴입니다. 자신의 남동생을 죽인 자를 응징하겠다고 스스로 킬러가 되려는 마틸다도 마찬가지이지요. 마틸다가 초록 화분을 꼭 끌어안으면서 한쪽 손에는 권총을 쥐는 것 또한 자신이 세운 스키마 안에 갇혀 버리고 만 겁니다. 또 다른 원칙과 원칙이 세워지는 것이지요.


 

인간은 스키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틀을 부수고, 다시 형성하면서 점점 확장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한번 해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틀을 부순 경험은 또다시 틀을 부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합니다. 길복순의 딸 재영이 친구한테 한 마지막 말은 또 다른 스키마를 암시합니다. 나는 너를 까발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지만 살려줄게. 너그럽게 용서를 베풀어주는 거야!

인간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킬러인 엄마처럼 재영도 그 길을 걷게 될까요? 마치 신처럼 인간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것에 쾌감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럴 거라고 여겨집니다. 또 다른 마틸다가 탄생 되겠지요. 복수와 복수로 똬리를 틀면서 살아가겠지요.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은 자신의 스키마를 깼습니다. 항간에는 그를 두고 마약쟁이라며 손가락질을 하거나 학살자의 집안이라며 침을 뱉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약쟁이가 하는 것이니 신빙성이 없다고 손을 내저을 수도 있겠습니다. 누군가는 아무리 그대로 집안의 비밀과 선조의 잘못을 모조리 까발리는 그가 파렴치하다고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자신도 모르게 가져왔던 강력한 스키마를 깨는 중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아프고 고달프고 힘겨울 것이 뻔합니다.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가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우원이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참배하면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 희생자의 비석을 닦을 때도, 그가 참배일지에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 계신 모든 분들이십니다.”라고 썼을 때도 오랫동안 지배했던 스키마가 깨지고 새로운 스키마가 형성되는 순간들이었지요. 그것이 바로 치유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입니다. 단약을 평생 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살아가야겠지만, 스키마를 깨기 시작한 이 용기의 에너지는 그를 온전하게 이끌어줄 것이라 여겨집니다. 마약 투약에 대한 수사를 받고 경찰서 문을 막 나온 그에게 광주 묘역에 가려고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 목숨이 소중한 것처럼 그들의 목숨도 소중하니까요. 그런데 그 목숨을 빼앗은 할아버지를 둔 저는 죄인입니다.” 

이 진솔한 전우원한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족자들은 손을 잡아주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낡고 왜곡된 스키마가 깨지는 순간에는 화해와 위로, 치유의 에너지가 작용하게 됩니다.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자신이 가진 힘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길복순, 그녀의 딸 재영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암담할 따름입니다. 다만, 약간의 희망이라도 걸고 싶은 말은 재영이 남긴 이 말입니다. “잘 지내!” 그리고 돌아서는 재영의 경쾌한 발걸음과 남겨진 친구의 은은한 미소!


 

우리 모두 부디 잘 지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잘 지내려면 내가 알고 있는 것, 내 과거의 경험으로 가치 판단을 내리고 타인을 처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멈춰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다만 신의 섭리에 의해서, 모든 것을 맡기면서 내가 하려고 버둥대는 것이 아니라 신이 하시도록 내려놓을 때 놀랍게도 스키마를 다듬어주는 신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트릴로,

봄빛을 가득 머금은 벚꽃이 꽃비, 꽃눈이 되어 내리면, 땅이 호사를 누리며 꽃 이불을 덮게 되겠지요. 온화한 바람이 불고, 바닥을 쪼르르 떼 지어 굴러다니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저는 오랜만에 한 편의 시를 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3. 4. 2. 시아-



              


 * 이 편지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극복하고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해방한 모리스 위트릴로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인 구순이 넘은 제 어머니와 연관되어 치유와 관련한 체험을 공감해줄 위트릴로한테 띄우는 간곡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편지 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