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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Jan 31. 2024

편지 여덟,

-모두 죽여라-


위트릴로,

매주 목요일마다 ‘마음의 창’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주교육문화회관에서 하는 시·수필 창작을 위한 강의이지요. 오늘 수강생분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그러니까 ‘미래 시학’ 여름호에 실릴 ‘특별기획 시리즈’ 원고인데, 이 글의 핵심 내용을 수강생분들과 나눴지요. 불과 오 일 전에 쓴 이 글을 수강생분들께 보여 드리겠다고 했거든요. 모든 것은 ‘모두 죽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미래 시학’측에 보낸 원고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위트릴로,

미리 말씀드리지만요. ‘마음의 창’ 수강생분들은 너무나 빛났습니다. 시를 만나고 나서 “자신 안에 죽일 수 있는 것을 써보세요!”라고 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 삶에 대해 함부로 낙담하는 것, 아침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을 죽이려 하는 글을 쓰고 나눴습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 모두 죽이는 반전 이야기를 이제 시작합니다.     





마음의 빛을 찾아서

-이승훈 시 ‘모두 죽여라’의 치유 비평- 



  

죽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자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화제에 올리기를 극도로 꺼린다. 하필 ‘죽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시가 있다. 그것도 시 전문을 보면, ‘죽음’이 제목까지 포함해서 총 17번이 나온다. 그것도 다만 ‘죽음’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동사에다가 한술 더 떠서 명령형으로 쓰고 있다. ‘죽여라!’라니. 도대체 이 시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장 시부터 읽어보자.   





                                                  모두 죽여라

                                                                                             

                                                                                                                           이승훈



 시를 만나면 시를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여라. 언어를 만나면 언어를 죽이고 벽돌도 죽이고 나무 꽃 이슬 모조리 죽여라. 지금 당신이 걸어가는 아스팔트 아스파라거스 아스피린 아편도 죽여라. 선배를 만나면 선배를 죽이고 후배를 만나면 후배를 죽여라. 스승도 죽이고 시금치도 죽이고 오늘 점심때 먹은 시금치 고사리 닭고기 닭 뼈다귀 닭 울음 닭 울음도 죽여라. 사랑도 죽이고 증오도 죽이고 순수도 서정도 죽이고 국수 먹다 말고 일어나라. 모자 쓰다 말고 웃어라. 시냇물 시냇물도 죽이고 푸른 하늘 한 사발이 있을 뿐이다.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고 당신이 웃으면 나도 웃는다. 개구리 거북이도 웃고 이 시는 당나라 선사 임제 스타일로 한번 써본 것. 이런 시도 죽여라, 모두 허망한 이름일 뿐이다. 


                                       -시 전문: 201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진은영 외, 서울: 현대문학, P169-  




이 시는 낭송할 수 없는 시다. 간혹 낭송이 아니라 묵송(默誦)을 해야 어울리는 시가 있다. 감성과 감수성은 예술이 가진 기본 토대이지만, 게다가 낭송을 통해 그것이 확장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깊은 사유와 사상, 성찰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 철학 시는 마음속으로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자칫 섣부른 감성이 시를 통한 사유의 골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러니 모든 시를 낭송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소리 내어 외치면서 부르짖듯이 기도할 수도 있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않고 기도드릴 수 있다. 겉으로는 침묵한 듯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침묵은 다만 침묵이 아니다. 영혼의 정중앙에서 신과 대화를 나눌 때 입술은 굳게 닫혀있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다소 곁가지로 갔지만, 다시 시로 돌아와 보겠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에서 ‘죽여라’라고 하면서 그것도 ‘모두’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 명령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 먼저 고찰해보자.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에 관한 무수한 명언 중에서 다음 세 가지를 들여다보자. 이 시의 함축된 의미와 통하는 ‘죽음의 명언’ 세 가지로 죽음의 꾸러미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죽을 때에 죽지 않도록 죽기 전에 죽어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정말 죽어 버린다.”고 했다. 유물론자인 엥겔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놀랍다. 그의 사상을 견주어 이 말을 이해하기보다는 말 자체에 중점을 두고 파악해 보자. 엥겔스의 말은 시의 주제를 단 두 마디의 말로 요약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직 살아있을 때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게 한다. 여기서 ‘죽음’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정신, 마음, 영혼, 양심 같은 비물질적인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Walter Whitman)은 “죽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일어날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은 자연스럽게 정현종 시인의 단 두 줄로 된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라는 시를 떠올리게 한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정현종의 시에서 말하는 ‘자기를 벗어날 때’는 자신을 벗어던지는 것이고, 이는 곧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을 죽이는 것’에서 사유의 갈래를 뻗어 나가면 편견, 아집, 가치관, 스키마(schema) 따위가 될 것이다.



‘스키마’는 ‘구조화된 지식틀’을 일컬으며, 한번 형성된 것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야말로 알을 깨고 나와서 알을 ‘죽여야’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 고정된 스키마는 단단한 자아를 이루게 하지만, 확고부동하다 보면 ‘우물 안의 개구리’ 되기가 십상이다.



1919년에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데미안’이라는 소설에서 “새는 알에서 깨어 나오려 한다. 알에서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라고 했다. ‘아브락사스(Abraxas)’의 7글자는 7개의 빛, 또는 수리적인 의미로 365일을 의미한다. 2세기의 성 그노시스파였던 바실레이데스(Basileidēs)에 의하면 우주는 365층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최하층 신이 아브락사스라고 한다. 이 신은 지구나 인류를 창조하고, 7개의 속성에 의해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아브락사스는 불완전한 이 세상의 지배자인 동시에 365층의 하늘 위에 있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매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에 의하면, 아브락사스는 모든 대립물이 한 존재 안에 결합한 신을 뜻한다. 끊임없이 선과 악, 좋고 싫음, 맞고 틀리고 식의 대립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아브락사스’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하나의 알이 아니라 무수한 알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알에서 깨어나오는 찰나, 이 모든 대립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찬란한 아름다운 순간일 수밖에 없다. 이분법적으로 따지며 줄을 세우며 살아가는 삼 차원적인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야 비로소 자아(ego)에 머물러 살던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게 된다. 융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든 마땅히 자아에서 자기(self)로 가야 하며, 그러지 않을 때 병리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 수시로 죽는다는 것은 자주 자신의 자아(ego)를 죽이는 것이 되며, 이는 제대로 삶을 살아나가는 탁월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자각하여 죽음을 향해 나아 가고 있는 자는 누구든 자유롭다.”라는 말을 살펴보자. ‘자각’이라는 말은 스스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향해 나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두려움 속에 파묻어둔 채여서 그렇다. 하지만 야스퍼스는 자각하여 죽음을 향해 나아 가고 있는 자를 소환한다. 그만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자각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와 연결되는가.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을 직면하는 것은 두렵지 않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마음 챙김 스트레스 완화(MBSR) 프로그램의 창시자인 존 카밧진 (Jon Kabat-Zinn)은 “일어나는 정서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치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외면과 격리야말로 병리적인 현상을 불러온다. 직면함으로써 치유가 일어난다. 그러니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식은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다.



‘극복’은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삶을 ‘성공’으로 이끈다. ‘성공’이라는 말이 나왔기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성공은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한다. 흔히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하지만, 성공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목표지점은 늘 바뀌어서 마치 무지개를 잡는 것과 같다. 대개 성공은 욕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욕망이 날뛸수록 성공의 푯대도 덩달아 날뛴다. 일견 성공을 잡는가 하지만 그 순간 성공은 멀찌감치 떨어진 채 서 있다. 결코 잡을 수 없는 성공에 대한 무수한 이야깃거리와 예술작품들이 있다. 그러니 ‘성공’을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학력의 목표치 달성에 두게 되면 잡는 순간, 멀어져 버린다. 혹은 성공은 과거의 한때가 전락하고 만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성공의 개념은 바로 ‘극복’에 있다. 삶은 무수한 극복의 순간들로 이뤄져 있고, 극복의 정도가 성공을 판가름하게 된다. 따라서 “성공은 역경의 극복이다.”라는 새로운 정의가 내려질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성공’의 순간은 진정한 자유를 체험하는 때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의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대로 진리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카를 야스퍼스의 말은 죽음을 직면해서, 죽음을 극복할 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떠올리면, 17세기 일본의 시인 마쓰오 바쇼(Matsuo Basho)의 하이쿠와 연결된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 /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 얼굴들일세”. 특히 초상집에 가면 이러한 착각에 빠지기 쉽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를 향한 회한에 겨워 울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은 마치 죽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자연히 나오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야 하리라. 죽음과 늘 호흡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제 명언들을 살펴봤으니, 원래 하고자 했던 ‘모두 죽여라’ 안으로 들어가 보자. 시는 시종일관 ‘죽여라’라고 강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봤던 세 가지 죽음에 대한 사유에 대해 연결해서 보자면, ‘죽음’은 무거우나 가볍다. 얼마나 가벼운지 ‘웃게’ 만든다. 그것은 죽였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통쾌함이다. 우리는 얼마나 엄중한 스키마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둬놓고 살아가는가. 삶의 굴레는 또 얼마나 우리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가. 대부분 자신이 가진 것을 절대 ‘죽이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며 살아간다.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간에 말이다.



시인은 그 ‘아등바등’의 예를 실컷 들고 있다. 시, 나, 언어, 벽돌, 나무, 꽃, 이슬 등등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스팔트’, ‘아스파라거스’, ‘아스피린’, ‘아편’에 이르러서는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 실은 말장난인데, 그것마저 유쾌하기 이를 데 없다. 다음 구절에도 죽이는 대상은 계속된다. 선배, 후배, 스승, 시금치. 그리고 하다못해 점심때 적은 시금치와 고사리와 닭고기, 닭, 닭 뼈다귀, 닭에 이르러서는 활달한 사유의 바람이 닭의 울음까지 등장하게 만든다. 울음에서 나오는 연상의 흐름은 다음의 단어를 줄줄이 엮어낸다. 사랑, 증오, 순수, 서정. 그러다가 반전이 일어난다. 돌연 ‘일어나라’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그것도 국수를 먹다 말고 일어나라니! 



흔히 국수에서 잔치를 연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관습에 의하면, 결혼식이나 생일 등의 특별한 잔칫날에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이 바로 ‘국수’였다. ‘잔치’는 기쁜 일이 있을 때 음식을 차려놓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즐기면서 축하해주는 것을 일컫는다. 시에서는 그렇게 모임에 어울려서 놀다가도 그만두고 일어나라고 한다. 그러다가 격식을 갖추려고 혹은 어디를 가려고 나서는 채비를 차릴 요량으로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그것마저 멈추고 ‘웃어라’라고 한다. 여기서 다시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는 ‘죽여라’도 아니고 ‘일어나라’도 아니고 ‘웃어라’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주제인 죽이라는 말이 한 번 더 도장을 찍듯 나온다. 시냇물도 죽이고 그런데 갑자기 ‘푸른 하늘’이 등장한다. ‘한 사발의 푸른 하늘’이라니. 어떤 뜻인가. 그러다가 ‘사발’에 의식의 흐름이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이제 ‘술’이 나온다. 술에 취하면 당신이 웃고, 나도 웃고, 개구리, 거북이도 웃는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 죽이다 보면 일어나게 되고, 일어나다 보면 웃게 되는 것일까?



시인은 짐짓 너스레를 떤다. 이거, 말 안되는 것 알아. 많이 헷갈리는 것도 알아. 그런데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뼈가 있다고! 논리에 맞지도 않고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뿌리가 있다다는 말이지! 너털웃음과 함께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시인은 자신이 흉내 내고 있는 존재를 밝히기까지 한다. 바로 당나라 때 승려 시인 임제 의현(臨濟義玄)이다. 선종의 한 갈래인 임제종(臨濟宗)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황벽선사(黃檗希運)의 법을 전해 받아 854년부터 임제원의 주지를 지냈다. 따라서 의현이 일으킨 종파를 임제종(臨濟宗)이라고 하며, 임제의현(臨濟義玄), 임제 스님, 임제 선사로도 불린다. 그가 남긴 ‘임제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蓬佛殺佛),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일 것이며蓬祖殺祖),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蓬羅漢殺羅漢),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만(蓬父母殺父母) 비로소 해탈할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무릎을 탁, 칠 것이다. 다분히 임제 선사의 문구를 패러디한 시라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패러디 안에는 ‘해학’의 정신이 있다. ‘해학’에는 익살스럽긴 하지만, 품위 있게 인간적인 향기로 웃도록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시 본 주제인 시로 넘어가기 전에 임제 선사의 인용한 구절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부처, 조사(불교의 총대주교인 스님), 아라한(소승 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이), 부모는 모두 존경할 인물이다. 더군다나 불교에서 최고의 존재로 추앙하는 ‘부처’를 죽이라니! 어떠한 형식이나 이성적인 전개가 아니라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적인 사유를 담은 선시(禪詩)는 선과 시가 하나로 연결된 시를 일컫는다. 감히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렇더라도 뜻을 새겨보면, ‘죽임’은 ‘사로잡힘’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그 속에 빠져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 알에서 깨어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만이 전부라고 판단하는 주관적인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일컫는다. 그것은 바로 완고하게 굳어버려 논리적인 가치판단에 좌우되는 자아(ego)를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한 것이어도 그 안에 갇혀 있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니, 예를 든 대상이 지고지순한 경외심을 유발하는가, 혹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흔한 대상이거나 간에 같이 통용된다. 임제 선사의 글에서 ‘죽인다’는 의미와 이승훈의 시에서 ‘죽여라’의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죽여야 하는 대상은 사실, 가릴 것이 없다. 그 어떤 것도 극복해야 하고 초월해야 할 뿐이다. 갇혀 있기를 내려놓을수록 경계는 허물게 되고, 우주 만물은 하나가 된다. 



다시, 이승훈의 시로 돌아와 보자. 시인은 마지막 구절에서 한술 더 뜬다. ‘이런 시도 죽여라’라고 단언한다. ‘이런 시’는 어떤 시인가? ‘임제 스타일’의 시? 선시를 흉내 낸 시? 산문시? 이승훈 시인은 1942년생이고 2018년에 사망했다. 불교에 심취했으며 그는 2013년에 제18회 현대불교문학상, 2016년에는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했으며, 철학적 성격으로 사유를 확장하는 무경계의 시들을 남겼다. 그가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했을 당시 소감이 ‘이런 시’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사는 게 서글픈 떠돌이 시인이자 자폐증에 시달리는 정년 퇴임 교수이자 선객(禪客)일 뿐”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미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시를 썼지만 이제 시는 시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른다.” 

시인이 시를 모른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또 자신을 시로 드러내놓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이가 나를 모른다니,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다시, 시 마지막 구절 안으로 돌아와 보자. ‘모두 허망한 이름일 뿐이다.’ 그야말로 허망한 결말이다. 가진 것을 하나도 없고, 악착스럽게 살았던 시간들도 모조리 날아가고 말았다. 그래도 남는 것은 죽인 것들, 일어난 것, 웃은 것이다. 그게 결국 이름 없이 남았다. 이름을 가진 것들은 허망하게 사라지지만, 어차피 형체도 이름도 없는 것은 제대로 남을 것이다.



19세기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은 모비딕(Moby Dick)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인지도 몰라.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며 흐린 물을 가장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내 몸뚱이는 더 나은 내 존재의 찌꺼기일 뿐인지도 모르지.” 소설의 화자인 이스마엘은 그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다. “원하는 사람은 내 몸뚱이를 가져가도 좋다. 맘대로 가져가. 이건 내가 아니니까. ...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으리라(출처: 김석희 역 ‘모비딕’, 작가정신, 72쪽).” 이러한 마음으로 승선한 주인공 이스마엘. 포경선은 침몰하지만, 이스마엘은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그의 이러한 독백은 육체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 영혼은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매 순간 죽는 까닭에 결국 온전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소설 모비딕의 인용한 구절에서도 이름을 붙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허망할 뿐이라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게다가 인간을 이루는 진짜는 ‘영혼’이며, 영혼이야말로 온전하게 보존될 뿐이라는 사실로 삶에 대한 용기를 내고 있다. ‘모비딕’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소설 속 등장인물인 에이허브 선장은 언젠가 자신의 다리를 잃게 한 고래를 잡기 위해 혈안이다. 엄청난 복수심으로 모비딕한테 작살을 꽂지만, 작살에 연결된 로프에 휘감겨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비극이다. 




통합 예술 · 문화치유인 심상 시치료에서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다. 먼저 시를 낭송하되, 배경 음악 없이 낭송하는 것이 좋다. 혼자서 묵송하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치료 현장에서는 내담자와 치료사가 함께 있기에 치료 프로그램의 흐름으로 볼 때 낭송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배경 음악 없이 하는 이유는 시 본래의 의미를 깊이 사유하면서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시의 느낌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눈다. 다음, 시 구절 중에서 특히 눈이 가는 부분을 포착하고 그렇게 정한 이유를 나눈다. 다음으로 ‘죽이라’라는 말이 주는 느낌과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에 관해 충분히 나눈다. 치료사(혹은 진행자)는 내담자를 시 안으로 안내해서 함께 시의 숲에서 마음껏 즐겨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치료사는 ‘죽여라’라는 의미에 관하여 위에서 기술한 내용에 관해 내담자와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뒤 내담자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죽이는 것을 실천하고 싶은 것을 하나 선택하도록 하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적어보도록 한다. 치료사는 ‘죽이는 것’의 선택은 다분히 자신이 가진 ‘스키마’를 무너뜨리고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점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죽이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지금부터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적는다. 이렇게 적은 내용을 함께 나눈다. 그렇게 하고 나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경험한 것에 대한 참여 소감을 함께 나누면서 마무리한다. 



이승훈 시 ‘모두 죽여라’의 심상 시치료 효과는 다음과 같다. 자아의 경계를 ‘죽임’으로써 나를 확장하여 세상을 비롯한 우주 만물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이로써 사유를 확장해나가 삶의 긍정성을 획득하여 활기찬 삶으로 거듭 태어나며,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 긍정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 기법은 심상 시치료 치료 효과에 따른 과정 중에서 ‘깊은 내면’에 적당하나 다른 단계에서도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다.  


          


-2023. 5. 11.  시아-



 * 이 편지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극복하고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해방한 모리스 위트릴로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인 구순이 넘은 제 어머니와 연관되어 치유와 관련한 체험을 공감해줄 위트릴로한테 띄우는 간곡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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