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cago, IL
갑자기 홀리듯 평소에 하지 않던 걸 할 때가 있다. 평소엔 가지 않던 곳을 가거나, 사거나, 먹거나, 만나거나. 무슨 바람이 들어 그랬냐고 하기엔 거창할 건 없지만, 규칙적이고 반복되는 생활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꽤 ‘바람 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틀 전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시카고에서 긴 레이오버가 있었다. 매번 열두시간 남짓한 체류시간에 제대로 도시를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주 방문했다는 생각때문인지 특별히 뭘 해야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그래도 이왕 왔으니 잠시 나갔다 와볼까 했다. 오후 5시경, 해지기 전에 서점 구경과 저녁거리를 사서 돌아올 심산으로 호텔을 나섰다. 지도에 검색하니 멀지 않은 곳에 서점 하나가 있었다.
새로운 도시에 방문하면 꼭 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서점 방문’이다. 기념품으로 모으는 엽서를 사기 위해서다. 다운타운 거리에 즐비한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touristy 한 엽서보단, 사연이 담긴듯 생긴 오래된 엽서나, 왠지 한참 바라보게 되는 묘한 사진이 담긴 엽서를 좋아한다. 이렇게 모은 엽서는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왜냐면 너무 아끼기 때문에…) 남에게 선물하거나 편지를 쓰는 데 사용하는데, 대부분은 그냥 내 방 책장에 잘 모셔둔다. 정말 모으기 위해 산 거니 책장에 죽은 듯이 처박혀 있어도 괜찮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잊을 만할 때쯤 꺼내서 방바닥에 주욱 나열해 보고는 다시 책장에 넣어둔다. 아무튼 이런 내 엽서 컬렉션에 어울리는 엽서는 보통 서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 간다.
검색해 찾은 이 서점은 오래된 건물 2층에 있었다.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라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계단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묻고서야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대형 서점에 비교하면 턱 없이 작은 사이즈였지만, 여러 개의 방이 연결된 구조에 사방 가득 책이 차 있었다. 밤에는 작가를 초청해서 강연이나 낭독을 하는 ‘문학의 밤’ 같은 시간을 갖는 듯 보였다.
첫 번째 방에 들어갔다. 아동용 책이 눈이 들어왔는데, 표지 디자인이 너무 이뻐서 펼쳐봤다가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바로 옆에 한국요리 책이 두권이나 나란히 진열돼있었다. 괜히 뿌듯한 마음이 책을 들었다 놨다, 요란을 떨었다. 엽서 찾기는 잠시 잊고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소설 코너였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으로 서점 직원들이 작성한 듯 보이는 도서평이 책장 곳곳에 달랑거리며 달려 있었다. 프린트한 것도 있었고, 수기로 작성해 읽기 힘든 필기체도 눈에 띄었다. 맨 구석에 있는 책을 소심하게 꺼냈다. 마치 한국 서점에 가서 읽을 책을 고를 때처럼, 겉표지와 작가소개를 읽고, 첫 두 페이지 정도를 읽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영어로 된 책은 잘 안 읽는다. 사실 못 읽는다. 대학생 때 전공 서적을 끝으로 영어로 책을 읽었던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일단 영어가 아직도 내게는 어렵다. 특히 문학작품 속 영어는 더더욱, 그러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게다가 내가 좋아서 읽는 책인데, 그 시간까지 영어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게, 내 마음속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 이 서점에서 읽을 책을 한 권 꼭 사야겠다’라는 다짐이 들었다. 그 순간은 비장하게 다짐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꽤 귀여운 다짐이다.
그 이후로도 한 시간가량 더 머물며 이런저런 책들을 들여다봤다. 읽어보고 싶다고 느낀 책이 여러 권 있었던 걸 보면, 마냥 이해를 못 한 건 아니었나 보다. 마음이 가던 두 권을 손에 들고 어떤 걸 선택할까 고민하던 중, 새로운 책에 눈이 갔다. 표지가 샛노란 색이었다. 제목은 ‘Lemon’. 이 얼마나 정직한 표지인가! 하단에 적혀있는 작가의 이름이 한국이름이다. 펼쳐서 첫 장을 읽어봤는데 계속 읽고 싶었다.
그 책과 마음에 꼭 드는 엽서 한 장을 사서 서점을 나왔다. 기분이 좋았는데, 설레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게 딱 떨어지게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굳이 풀어보자면, 빨리 돌아가서 이 책을 시작하고 싶었고, 나름 새로운 시작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과 도전하는 내 모습이 기특했던 것 같다. 이게 뭐라고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저녁을 사러 가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도전을 하나 했으니, 남은 저녁은 익숙함으로 채워야겠다. 시카고에 왔으니 시카고 피자를 먹어야 하나? 가렛 팝콘이 유명하니 팝콘을 왕창 사서 들어갈까? 뭘 먹을지 고민했던 순간이 무색해졌다. 근처 푸드코트로 가서, 캘리포니아에서도 종종 먹는 타이 음식을 시켰다. 몇 블록 옆, 좋아하는 베이커리에 들려 바나나 푸딩도 작은 사이즈로 하나 시켰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그린커리와 익숙한 바나나 푸딩,
그리고 하나도 익숙하지 않은 영어 소설책 한 권을 품고 호텔로 돌아간다. 아직도 기분이 이상하다.
내 안에는 익숙함을 지키고 싶은 본능이 있다. 그래서 익숙함을 깨는 낯선 바람이 불면 옷을 여미게 된다. 그런데 오히려 옷을 벗고 바람을 느끼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너무 춥진 않을까 하다가도 옷을 벗어 던지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용기를 내 그 바람을 느낀다. 낯선 바람을 마주해야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도전은 아주 작더라도 내게 선물을 가져다준다. 마치 영어책 울렁증이 한 레벨 낮아진 것 처럼.
여행지에서 불어오는 낯선 바람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