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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굳이,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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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Feb 03. 2023

꼭 필요한 것만 사기

Minneapolis, MN

4월에도 영하 날씨와 폭설이 놀랍지 않은 곳. 바로 미네소타주. 이곳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쇼핑몰 Mall of America (MoA)가 있다. 모든 가게를 다 구경하려면 하루가 부족하다. 나를 포함한 길치들은 틈틈히 지도를 확인하며 움직여야한다. 쇼핑몰에 롤러코스터까지 갖춘 놀이동산이 딸려있는걸 보니 ‘역시 미국이다’ 싶다.

회사에서는 이곳에서 레이오버가 15시간 이상인 경우, 몰에 매우 근접한 호텔에 숙소를 잡아준다. 미네소타주는 의, 식, 주 중 ‘의’에 해당하는 품목에 대해서는 판매세를 따로 부과하지 않으니, 쇼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일 수 없다. 크리스마스 같은 쇼핑 시즌이 다가오면, 일부러 이 도시 레이오버 스케줄을 요청하는 승무원들도 많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


밤 비행 후 호텔에 도착했을 땐 몸이 피곤해 별 기대가 없었다. 해가 떠오를 때쯤 기절하듯 잠들고 일어나니, 필요했던 것들이 하나 둘 생각나며 쇼핑 갈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집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휴무 날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최근 비행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사지 못했던 것들을 다 사겠노라 다짐했다.


가장 먼저 호텔에서 신을 슬리퍼를 찾으러 갔다. 약 2년간 아주 잘 신던 슬리퍼가 지난 비행 중 장렬히 전사한 후, 일등석에서 나눠주는 일회용 슬리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중이었다. 구체적으로 원하던 게 있었는데, 첫 번째로 들어간 가게에서 그 모든 기준에 꼭 부합하는 슬리퍼를 바로 찾았다. 방 안에서 편하게 신을 수 있게 발바닥 닿는 부분이 고무보다는 보들보들한 천이었으면 했다. 화장실 바닥이 젖어도 신을 수 있게 밑창은 두께가 조금 있으면서 천이 아니여야 했고, 로비나 호텔 바로 앞처럼 잠시 방을 나가야 할 때도 신어야 하니, 너무 실내화 같은 느낌은 아니었음 했다. 마음에 쏙 드는 슬리퍼를, 게다가 단 돈 10불에 구매했다!


그다음은 스마트 티비가 없는 호텔에서도 넷플릭스를 볼 수 있게 해주는 Roku 리모컨 건전지를 사러 갔다. 고단한 하루 끝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다.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 보고 자려했는데, 리모컨 배터리가 없었다. 결국 티비를 앞에 두고 핸드폰으로 봐야 할 때 그 억울함이란... 건전지 사기가 왜 그렇게 쉽지 않았는지, 약 열흘을 그렇게 지냈다. 그래서였을까 그렇게 찾던 AAA 사이즈의 건전지를 찾아 장바구니에 담는 순간 너무 감격스러웠다. 이제 티비로 넷플릭스 볼 수 있다.


그리고 작년 겨울부터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크록스를 질렀다. '작년부터 사고 싶었던 거니깐, 충동구매는 아니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흰색과 노란색 사이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Peanuts 한정판으로 흰색과 노란색이 섞인 디자인이 떡 하니 진열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거 무슨 뜻이야? 무조건 사라는 거지. '한정판'이 붙으면 역시나 가격이 올라간다. 다른 디자인보다 20불가량 더 비싼 가격을 보고 열 번은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결국 크록스와 함께, 그리고 크록스에 장식처럼 다는 지비츠까지 한아름 사버렸다. 사는 김에 생각난 친구 지비츠도 두 개 더.


마지막으로 엄마랑 내가 입을 후리스를 하나씩 샀다. 엄마는 옷가게를 가면 내가 같이 가지 않더라도 내 옷을 꼭 보신다. 그리고 나한테 잘 어울리는 게 있으면 사 오신다. 엄마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전혀 계획에 없었지만, 내 옷을 보던 중 왠지 엄마랑 이 옷을 같이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캘리포니아에 가을이 다가오고 있고 (사실상 가을이랄께 없는 캘리포니아의 가을은 곧 겨울이 온다는 아주 찰나의 경고 같은 계절이다) 엄마는 추위를 많이 타신다. 똑같은 디자인으로 나는 M사이즈, 엄마는 S사이즈. 언제 갈지도 모를 엄마와의 여행을 위해 커플옷을 샀다고 엄마께 메시지를 보냈다.


여행지에 오면 기념품, 선물, 쇼핑이란 단어에 누군가는 떠오르기 마련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관계 속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평소에 챙기지 못했던 누군가가 여행 내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평소에 나를 잘 챙기지 못했다면 내가 떠오르기도 한다. 


진짜 필요했던 슬리퍼와 건전지만큼,

일 년 내내 갖고 싶었던 크록스도, 즉흥적으로 구매한 엄마와의 커플 옷도 진짜 필요했던 것 같다.


여행만큼 뜬금 없이 연락해보기도, 선물을 사가기도 좋은 명분이 없다. 

'낯선 이곳에서 그냥 당신이 생각났다'로 시작하는 메세지. 얼마나 따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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