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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노동

by 초이

주방엔 냉장고가 두 대 있다. 정수기와 팬트리 사이에 자리한 양문형 냉장고 하나와, 식탁 옆 구석에 자리한 일자형 냉장고 하나. 보통 일자형 냉장고는 식재료 보관보다는 저장 창고처럼 쓰인다. 한국에서 가져온 깨나 고춧가루, 몇 달은 버틸 양의 김치와 쌀, 한인마트 세일 기간을 노려 넉넉히 사온 음료수와 마스크팩 등을 쟁여둔다.


오전 11시. 아침에 먹은 토스트와 과일이 소화되고 슬슬 출출해지는 시간, 냉장고 두대를 연달아 열어본다. 뭔가 꽉 차있긴 한데 바로 꺼내 먹을 끼닛거리는 없을 때, 요리를 해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전 날 한 냄비 가득 끓인 닭개장이 반응이 좋았다. 요리사로서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두 끼는 먹겠지 했는데 한 끼 만에 동난 것.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는 한 요리계정이 생각난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매 끼니마다 새로운 반찬을, 국을 요리해 내는 그녀가 존경스럽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효녀메뉴, 함박스테이크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만큼 오래간다. 마음먹고 함박스테이크를 대량생산해 냉동실에 넣어두면, 스테이크만 구워 정식을 해먹을 수도, 빵 사이에 스테이크, 샐러드, 감자튀김을 넣고 샌드위치를 만들 수도, 미리 구워놓고 아침에 데우기만 하면 훌륭한 도시락 메뉴이기도 하다. 1타 3피인 셈.


어깨너머로 배운 엄마의 레시피도,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레시피도 웬만해선 다 맛있지만, 기름기가 없는 다진 소고기와 다진 돼지고기를 1:1 비율로 섞어 버터에 한 번 볶아낸 양파를 함께 치대 만든 게 가장 맛이 좋았다.


장보고 요리까지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야 하니 인스턴트 비빔면을 후딱 끓여 먹고 집 나갈 준비를 한다. 부지런히 만들어서 동생들에게 저녁으로 함박스테이크 정식을 해주리라. 한아름 사온 고기를 양념하고 치댄다. 너무 크면 익힐 때 힘들고 너무 작으면 미트볼 같아 보이니 가장 적당한 내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동그랗게 떼어 낸다. 하나, 둘, 셋…스물여섯… 총 스물여섯 개의 동그란 스테이크 반죽이 나왔다. 네 명이서 두장씩 세 번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식구가 많은 우리 가족, 한 사람이 몇 개씩 먹을 수 있는지 계산은 필수다.)


서로 달라붙지 않게 랩으로 덮어 통에 넣는다. 오늘 바로 먹을 8장은 따로 빼놓고 나머지는 냉동실 행. 한가득 쌓인 설거지를 모른채하고 싶다가도, 냉동실에 들어간 동글동글 스테이크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설거지까지 마치니 오후 네시가 다돼 간다. 금방 또 저녁 먹을 시간이다. 뒷정리를 마저 하고 빨리 침대에 몸을 뉘인다. 계속 서있다가 몸에 힘이 풀어지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요리하나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걸까.

가만히 누워있으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몽롱한 의식 속 들리는 마음의 소리.

몸이 무거운 게 당연하지. 몇 시간 서서 장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요리는 단연코 노동이다.

매일, 매끼, 이런 노동을 해야 한다면 그건 참 잔인한 일이리.


요리 후 허리 좀 피고 온다며 방에 올라가 쉬던 엄마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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