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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시작은 '마식정'부터

by 초이

우리집엔 좀 특이한 제도가 있다. 이름하여 각설제도. '각자 설거지'의 줄임말인데, 말 그대로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씻는다.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 국그릇까지 전부. 식구 많은 집의 생존법칙이다.


엄마가 한국으로 가신 이후, 이 규칙은 더욱 강화되었다. 식탁에 누가 사용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컵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함께 요리하고 남겨진 프라이팬이나 냄비 등의 조리도구들은 누가 닦는 게 맞는지 기준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 번 하고 말지’라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희생 정신은 ‘내가 저번에 해줬는데 왜 너는 안 해줘’라는 억울함이 되어 서로를 공격했다. 고작 포크 하나, 국자 하나에 자매 간에 의가 상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동생들이 이른 아침 집을 나선 어느 날이었다.

전날 저녁, 해물파스타를 거하게 만들어 먹고, 야식으로 떡볶이까지 해치웠던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다들 고된 하루를 보낸 날이었고, 나는 다음날 비행이 없었다. 떡볶이가 불러일으킨 도파민 때문이었을까. 괜히 통 큰 사람처럼, "설거지는 그냥 둬, 언니가 내일 다 할게!"라고 외치며 미래의 나에게 모든 걸 맡겼었다. 다음 날, 점심쯤이 되서야 주방으로 향했고, 주방은 어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한 것도 아닌데, 싱크대 두 칸이 그릇과 냄비로 꽉 들어차 있었다. 고무장갑을 낀 손끝에서 묘한 결심이 느껴졌다.


설거지에 속하는 영역은 생각보다 넓다. 개수대에 쌓여있는 마른 식기 정리부터 시작되는데, 가스레인지 주변으로 말라붙은 음식물과 넘친 국물 자국들, 싱크대 주변에 널려있는 행주며, 조리도구 세척도 잊으면 안된다. 음식물 쓰레기도 처리해야 하고 물기가 고여있는 수세미 거치대도 닦아야 했다. 50리터 봉지를 사용하는 주방 쓰레기통이 꽉 차있기라도 한다면 쓰레기통 비우기도 포함된다. 큰 마음먹고 이 모든 걸 해치운 날에는 동생들에게 내가 뭘 얼마나 했는지 카톡으로 구구절절 설명하고, 수고했다는 말을 꼭 들었다.


'설거지'라 불리는 이 가사노동의 과정에서 세제 묻은 수세미로 그릇을 닦아내고 헹구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비중을 차지했다. 문득 떠오른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엄마는 가서 쉬세요!"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그날의 나.


이미 꽉 찬 개수대에 아슬아슬하게 그릇으로 탑을 쌓아두고는, 큰 일 해낸 사람처럼 생색 냈던 날. 엄마에게 큰 쉼을 줬다고 어깨 으쓱했던 날. 이제와 생각하면, 엄마는 결국 주방에 다시 가셨겠지 싶다.


’아 이건 좀 처리하기 곤란하네, 엄마에게 토스!‘ 하며 슬쩍 넘겼던 작은 일들이 모이고 모여 얼마나 큰 일이 되었을까.


엄마는 어째서 ‘나는 맨날 하는데 왜 너희는 안 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을까.


주문처럼 외워보자.

설거지의 시작은 마식정, '마른 식기 정리'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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